세계의 공통어- 한국어

동계 | 2020.01.06 11:39 | 조회 820




▒ 작품번호 : 931039

▒ 구 분 : dongg.com> 작품갤러리> 서예> 병풍
▒ 명 제 :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

▒ 작품크기 :70*135cm*3
▒ 판매가격 : 판매가격 일억오천만원

▒ 문의전화 : 054 749 6020.  010 3844 1500
▒ 해 설 

* 이 작품은 아마도 먼날에 알게 될 것입니다.


* 한글이 얼마나 뛰어날까? 그 해답은 한 예로   중국 유학생과 미국 유학생이 열심히 인터넷을 하고 있는데

 유독 한국 유학생은 무언가 예유롭게 놀면서 쉬고 있었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그걸 단 몇 초 만에 끝냈다고 했다.  

그럼 "왜  그렇게 빠른가?' 를 알아 보니 세종대황이 지으신 훈민정음의 한국어 때문이라고 했다

음!! 그래서 지식인. 학자들이 공통어라는 견해가 있었구나 싶다,


* 작품의 동기 이미 지구촌에 많은 학자 ‧ 지식인들에 의하여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작자의 소신은 아마도 5천~1억년 후면 작품 제목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에 그 필요성 유발과 예상 진행과정 등을 사실적으로, 이미 20~30년 전에 생각하여 구체화한 예언서술 작품입니다.

 
* 우리는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다”라는 긍지로  성군(세종대왕)의 어렵고 힘든 보살핌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의 공통어가 될 수 있다는 그 이유는 아래의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체'를  읽어 보시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 같아 이 글을 올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2020. 1. 6  동계 박후동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체


가. 訓民正音에 대하여
1.훈민정음이란?
세종이 직접 계획하고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으로 만든 우리겨레 최초로 만든 문자<훈민정음>의 뜻은 다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둘째. 세종이 창제하고, 우리 민족이 사용할 문자 체계를 이르는 말이다. 한글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셋째. <훈민정음>이라는 핵의 제목이다.
넷째. <훈민정음>. 곧 해례본을 말하는 것으로, <훈민정음편>과 <훈민정음해례편>에 기록된        창제 목적과, 이론적 해설 내용과 그 체계 등을 적은 책을 말한다.
가)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세종의 문자 창제의 목적과 정신이 정확히 드러나는 말이며 이 말은 분석하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로 나눌 수 있다.
‘백성을’이란 말은 언어와 문자가 인류 모두에게 두루 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가치와 지향할 정신을 말한다.
언어와 문자가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을 위한 것이 아닌, 모든 사람이 편하게 통용할 수 있다는 문자사용의 가장 이상적인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르치는’이란 말은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쉬운 글자를 만들고, 그 글자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일깨워줘 일상의 삶이 변화되게 하려는 의도를 말한다.

‘바른(正)’이란 말은 지금까지 써 왔던 우리말과 그 말을 가록했던 한자와 한문이 서로 소통이 되지 않아 백성들이 자기의 생각과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전제하는 말이다.
따라서 배우기 쉽고 쓰기 편안한 문자가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세종은 백성의 삶이 어렵고 힘든 것은 말과 글이 맞지 않아 일어나는 현상이라 여겼다. 그릇됨이나 불확실한 점이 전혀 없는, 정확하고 올바른 문자를 만들 것을 계획하고 다짐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정)‘이란 우리말을 기록할 (훈민정음)이 현하고 올바르며, 그로 인하여 혼란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문자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다.

‘소리(音)’란 말은 우리말은 담은 새로 만들어진 글자, 곧 (훈민정음)은 초성 17자음 중성 11모음. 그리고 종성이 합하여 하나의 독립된 소리를 이루는 소리글자임을 천명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훈민정음)의 28 자모는 각각의 음소들이 모여 낱개의 말소리를 이루게 되고. 그 말소리를 글자로 옮긴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말을 소리글자(표음문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종은 새 문자 (훈민정음)을 창조해 놓고 왜 ‘문자 창제’나 ‘글자를 만들다’라고 하지 않고 ‘정음’ 곧, 바른 소리라고 했을까? 명칭의 유래에 대한 전거나 기록이 전혀 없어 다만 짐작할 따름이지만. 드러난 명칭의 의미를 알면 그렇게 한 까닭을 알 수 있다. 세종은 새롭고. 완벽하고, 혁명적인 문자를 창제했으면서 (훈민정음)이란 너무나 의외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세종의 의도가 엉뚱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세종의 슬기롭고 탁월한 예지가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에 (훈민정음)의 명칭으로 ‘정음’ 대신 ‘문자’와 ‘글자’를 사용했다면, 그 말들은 한자 ‧ 한문에 대한 대립된 개념이 담겨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적인 마찰과, 시대적인 반발을 의식하여 ‘정음’이 라고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정음‘은 ’바른소리’ 라는 뜻이다. 우리말을 바르게 적는다는 의미와 함께 ‘와전된 한자음을 바르게 기록하기 위한 소리’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정음’은 우리말과 한자어의 발음을 적는 문자기호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것은 세종의 지혜와 슬기였다.

나) 세종25년에 완성된 문자 (훈민정음)으로, 우리 겨레가 사용할 문자를 이르는 말이다.
최초의 <훈민정음>으로, 우리 겨레가 사용할 문자를 이르는 말이다
최초의 <훈민정음> 필사본은 세종이 우리말을 기록할 문자의 창제를 계획한 뒤 십 수 년 동안 직접 연구하여. 그가 의도한 대로 세종 25년에 완성되었다.

다) 세종28년(1446년) 음력 9월 상한(上澣)에 반포된 한문으로 기록된 해설서로서 책 제목의 이름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책 표지에 ‘訓民正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첫 면 내제(內題)로 ‘훈민정음헤례가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책의 맨 마지막 면에도 ’訓民正音‘이라는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

라) 세종이 세종28년(1448년) 9월 상한에 창제한 문자, <훈민정음> <해례본> 의 이론적인 체계를 기록한 모든 내용을 말한다.
1책 33장 66면 목판본의 저술인데, <훈민정음>과 <훈민정음해례>가 수록된 유일한 책으로 일명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른다. 정음에는 세종의 문자 창제 목적과 정신을 담은 <어지>와 새 글자의 음가와 운용법을 간단하게 설명한 <예의>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 저술의 중심 부분의 <훈민정음해례>에는 제자원리와 초 ‧ 중 ‧ 종의 해설과, 글자가 이뤄지는 원리를 설명한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용자례>가 실려 있다. 그리고 정인지가 지은 서문이 있고, 그의 관직과 성명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2. 《훈민정음》 창제 기원에 대한 여러 학설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를 종합하여 기록한 책. 곧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신록>에 수록된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이 두 판본만 있었다. 이 두 판본에는 《훈민정음》의 중심 부분인 <해례>가 없기 때문에 체자원용에 대하여 전혀 알 수 없었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훈민정음》 자모의 제자원리와 문자 자형의 기원에 대한 주장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난무하였다.

가) 창살 무늬설
《훈민정음》의 자모는 한옥의 창살 무늬를 보고 만든 것이라는 설이다. 《훈민정음》은 아음 ㆁ(옛이응)과, ·후음 ㆆ(여린 히읗). ㅇ. ㅎ을 제외한 모든 자음은 직선 연결되어 이루어 졌다. 그리고 치음을 제외한 아음, 설음, 순음은 모두 직각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창살 무늬와 흡사한 것처럼 보여 주장한 엉뚱한 생각이다.

나) 자방고전(字倣古篆)설
《훈민정음》의 글자 형태는 전서를 모방해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신록> 세종28년 12월조에 보면 ‘상형이자방고전(上刑而字倣古篆)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석하면 ’글자는 고전을 본떠서 만들었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문 서예의 전서는 곧고 바른 획선이 많으며, 직각을 이루는 결구의 자형이 많다. 그리고 좌우 대칭적인 구조를 결구의 원칙으로 삼는 서체이다. 세종대 당시는 붓글씨가 일상에서 이뤄지던 시기였다. 따라서 기록문자의 서사 원칙이 중국 한문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전서라는 서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상형이자방고전이란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叫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세종25년 12월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이 글자는 옛 전자처럼 모양을 본떴고 말소리는 음률이 일곱 가락에 들어맞는다. 천 ‧ 지 ‧ 신 삼재와 이 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다) 몽고 파사파 문자 모방설
《훈민정음》이 몽고의 파스파 문자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설이다. 파사파 문자는 몽골 징기스칸의 손자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칸이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 국사인 파스파에게 명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게 하였다. 파스파는 티베트문자를 바탕으로 약간의 변형을 가해 파스파 문자를 만들었고, 1269년에 반포하였다 한자의 발음과 몽골어를 기록할 수 있는 문자로써 ‘몽고신자’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표기가 너무 어려워 일부 공문서나 비문, 인장 등에만 사용 되었다.

파사파 문자는 첫째. 중국의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둘째 중국의 전통적인 자모36자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졌고 셋째. 무음의 개념을 담은 유모자 7개를 도입하였다. 이런 접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관하여 세종과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글자의 모양은 흡사할지 모르지만 원리와 기능과, 효용 등은 전혀 다른 문자였다.

라) 가림토 문자 차용설
가림토 문자를 보고 그 기호의 형태를 참고하여 만들었다는 설이다.
가람은 ‘가려낸다’는 뜻으로 가림다문이라고도 말한다. 필사로 전하는 ,환단고기에 나오는 글자로 그 글자의 모양이 《훈민정음》과 너무나 유사하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가림토 문자가 한국의 고대 문자라는 것이다. 그 기록을 보면 우연의 일치일는지는 몰라도 너무나  《훈민정음》의 자모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가림토 문자의 자모 도판을 보면 중성11자가 《훈민정음》 초성‧ 중성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자형이 《훈민정음》과 너무나 비슷하여 《훈민정음》의 전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믿을 만한 증거가 없어 위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다.
경자 2년(BC 218년) 아직 풍속이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참글이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동네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람토’라 하였다. <환단고기 중에서>

그 내용이 《훈민정음》의 서문이나 신숙주가 쓴 <동운정운>의 서문과 너무나 흡사하다. 고대의 한국에 우리말과 일치하는 문자가 있었다면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역사서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세종이 그 어려운 난관을 해쳐가며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오늘날까지 기법토 문자로 기록된 고대 유물이나 문헌은 전해 오지 않고 있다. 조장의 무덤인 고인돌에도,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나 항아리. 그리고 검과 목간에도 기림토 문자 기록의 흔적은 전해 나타나지 않고 있다. 후대 누군가에 의해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보고 그럴싸하게 조장하려고 만들 기록이라 여겨진다.

마) 인도 범어 모방설
성종 때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훈민정음》의 범어 모방설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그는 《훈민정음》의 일부 글자는 범어에서 그 글꼴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初終聲八子 初聲8字 中城12字 其字體依梵字爲之...
<초 ‧ 종성팔자, 초성팔자, 중성 십이자의 글자 모양은 인도 산스크리트어(범어) 글자를 본으로 하였다.>

성현(1439년~1503년)의 주장은 《훈민정음》의 일부 글자는 범어에서 그 글꼴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현은 어린 시절 《훈민정음》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과거 시험에 《훈민정음》이 출제되기 때문에 과거시럼을 보기 위해서라도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조하였다는 사실과 그 우수성과 제자의 원리와 여러 내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등용 된 후에도 여러 저술 편찬사업에 참여하고. 자기의 수필집을 쓰고 남긴 사람이 왜 《훈민정음》 모방설을 제기하게 되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로 《훈민정음》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훈민정음》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볼 때, 성현 또한 기득권층인 사대부의 한사람이어서 그는 그렇게 엉뚱한 기록을 후세에 남게 된 것이다.

바) 일본 신대 문자 모방설
《훈민정음》이 일본 신대분자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다. 이 두 문자의 글꼴과 발음이 거의 흡사한데, 신대문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문자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8세기 에도시대 중엽 이후 보수의 국수주의 일분 학자들에게 의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진위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역설적으로 이 주장은 17~8세기에 《훈민정음》이 일본에 전파된 이후. 일본 가나문자가 뿌리도 없고. 제자원리도 없고 내세울 만한 사상적 배경도 없는 한자를 빌려 쓰는 문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견강부회(牽强附會). 억지로 지어 만든 불손한 주장일 뿐이다. 이 학설은 근거가 희박하고. 황당무개하다는 평가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문자의 발달사적으로 모순이고, 언어학적으로 커다란 문제접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주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사) 발음가관의 모양과 삼재(三才)위 원리 응용설
‘《훈민정음》은 자음은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고. 모음은 (천 ‧ 지‧ 인) 삼재(三才)의 음양오행설의 원리를 따라 만들었다’ 라고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당대 최고의 음운학자였다. 중국의 한자는 물론,일본 문자인 히라가나. 가다가나와. 여진의 문자(만주문자)와 티베트의 문자. 몽골의 파사파 문자. 인도의 산스크리트 <범어(梵語)> 중앙아사아의 위그르 문자 등 주변국의 언어와 문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모든 나라 각각의 문자 체계에 대한 역사와. 특징과. 장점과. 그리고 오완점. 단점에 이르기까지 말과 글의 합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만들면서 종합적으로 완벽한 문자이기를 바랐다. 그는 《훈민정음》이 반드시 아래와 같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1) 세상의 모든 소리를 기록할 수 있어야 하며.
2) 글자를 배우기 쉬워야 하며.
3) 글자 쓰기가 위워 문자생활이 편해야 하며.
4) 글자 읽기가 쉬워야 하며
5) 글자를 쉽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하며.
6)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최고 가치의 문자여야 하며.
7) 말과 글씨가 서로 맞아 잘 어울려야 하며
8) 글꼴도 보기에 예술적이고 아름다워야 하며
9) 초 ‧ 중 ‧ 종성이 보여 음을 이루는 성음의 원리가 분명해야 하고.
10) 일정하고 규칙적인 법도가 이어야 하며.
11) 철학적으로 논리가 정연하며.
12) 사상적으로 인류가 추구할 가장 고상한 이념이 담겨있어야 하며.
13) 이론적으로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14) 분명한 학술적으로 연구의 가치가 있어야 하며.
15) 전후. 좌우. 상하. 내외 어느 방향드로도 필사가 가능해야 하며.
16)글꼴의 변형이 있다 하여도 읽을 수 있고. 쓸 수도 있고. 의미까지도 알 수 있어야만 한자.

《훈민정음》이 창제되었을 때. 위의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행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세종마저도 《훈민정음》. 곧 한글이 현대 문자 언어학적인 분석과 연구를 통하여 세계 최고의 문자가 되고 . 여러 기능을 완벽하게 갖춰진 문자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만큼은 《훈민정음》이 여러 가지 조건과 상황에서 좋은 글자로써 전혀 흠이 없는 문자가 될 것을 굳게 믿었다 그래서 《훈민정음》은 분명 쉽게 배우고. 곧바로 읽고. 폭넓게 익히고. 올바르게 쓰고. 널리 가르치고. 깊게 알게 하고. 편하게 사용하여. 그 결과 백성들의 문화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세종은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이 문자가 앞날에 어떻게 활용될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은 했다. 다시 말해 앞날에 이 문자를 활용하여 백성들의 문자 생활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렇지만 오늘날 《훈민정음》이 평가처럼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고 창제된 문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반포하고 난 뒤 4년 만에 승하했다. 그는 《훈민정음》은 앞으로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편하게 할 것이며 의사소통과 지식과 기술의 전수에 큰 도움이 될 것을 믿었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 ‧ 한문만을 사용하는 기득권 세력과 중국을 맹목적으로 섬기려는 사대부들의 기피 현상에 의해 점점 그 사용이 미미해지기 시작했다. 일부 뜻 있는 주체의식이 강한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서포 김만중. 노계 박인로 같은 선비들에 의하여 《훈민정음》은 그 나름대로의 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특별히 궁중에서는 궁녀들에 의해 《훈민정음》으로 붓글씨로 소설을 필사했다. 그리고 소통을 위한 편지글을 쓰고. 여러 문서들을 붓글씨로 써서 전달하거나 보관하여 왔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온 한글 서예의 백미인 궁서체 한글인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1446년(세종28년) 9월 상한에 반포된 후 세월이 흐르고 흘러 575년이 지났다. 오늘의 《훈민정음》의 위상을 돌아볼 때. 그때 세종이 원하고 바라던 대로 그대로 되었다. 그중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다 그의 뜻대로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 수많은 언어 문자학자들에 의하여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완벽한 문자라는 사실이 온 누리에 증명되고 있다.


3. 《훈민정음》은 누가 만들었는가?
세상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완벽하고 훌륭하다는 《훈민정음》. 한글이라고도 부르는 이 문자는 과연 누가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반포하는 과정을 세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하여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창제될 당시까지도 모든 과정이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에. 그 진행 사항을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집현전학사들 중에서도 일부 학사들만 정해준 한 부분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궁중의 일부 사대부들은 그 내용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는 누가 했는지 억측만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한 학설로는 첫째. 세종이 전 과정을 직접 창제했다는 <친제설>. 둘째 세종과 집현전 학사가 함께 만든 <공동 창제설>. 셋째. 집현전 학사들의 협조를 받아 만든 <협조 창제설>. 넷째. 세종이 집현전 학사의 일부 도움을 받아 만든 <도움 창제설>. 다섯째.  세종의 명에 따라 창제했다는 <명제설>. 여섯째. 고대 문자 가림토 문자 모방설>이 있다

우리 한민족은 오천 년을 넘게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하지만 말은 있으나 글자가 없는 부조화의 삶을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 겨레는 기록에 대한 모든 분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사용하여 문자인 한자 ‧ 한문이 일상의 상용 문자였다니, 언어와 문자의 이중생활의 고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토록 어려운 언어와 문자 생활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조선 4대 왕 세종(世宗) 이도(李祹)이었다 세종은 중국의 운서인 <홍무정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말뿐 아니라 여러 언어의 음성학적 특징과 음운학적 특성을 정확하고 널리 파악하고 있었다.

세종은 집현전의 연구기능을 확대해 정인지. 성상문. 신숙주 등 당대의 젊은 수재들을 등용하여 연구를 분담하게 하였다. 그 후 <정음청>을 신설하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우리말에 맞는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궁구하였다.

앞에서 열거한 여러 주장을 설명하기 전에 역설적으로 믿을 만한 증거와 기록이 가장 많은 <세종 친제설>을 먼저 확실하게 정리하여 설명해야 맞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세종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완성한 전대미문의 최고 문자 창제라는 사실을 똑똑히 밝히고 정확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주장은 논리적으로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할 뿐만 아니라 억측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훈민정음》의 <세종 친제설>이 가장 신뢰를 받는 것은 다른 주장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그 근거 자료가 많고 뚜렷하며. 주장하는 논리의 앞뒤가 확연하고. 정확하고. 분명해서 비교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보아도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창제했다는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당시의 중요한 서적들의 전거를 살펴보면 세종이 직접 계획하고. 연구하고. 적용하고. 제자원리와 배경사상을 접합시켜 완벽한 문자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했음을 알 수 있다.

가) 세종이 전 과정을 직접 주관하여 만들었다는 ‘친제설’
세종이 가장 우선했던 정책은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려는 편민정책이었다. 새로운 문자의 창제는 절대 절명의 급한 상황으로 여겼다. 이때의 좋은 기회를 놓치면 우리말에 맞는 문자의 창제는 요원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목숨을 건 승부수를 던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종의 ‘친제설’은 세종이 문자 창제의 전 과정을 주관하여 계획하고 연구하여 만들었다는 설이다. 다시 말해 세종은 1443년 12월에 혼자서 창제 완료한 《훈민정음》을 반포하려 했다. 그러나 조정의 사대부들의 반대상소가 빗발치듯 올라오고. 신문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기득권을 잠재우고 난 뒤에 반포할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1443년 집현전 학사들에게 《훈민정음》 창제를 알리고 그 해설서인 <해례>를 짓도록 명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주장은 다음의 기록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첫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25년(1443년) 12월 30일 기록을 보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是月 訓民正音成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慾言 而終不得 伸基情者多矣 與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慾使人易習 便於日用耳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중국의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측은히 여계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모든 사람들로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둘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 25년(1443년)12월 30일조를 보면 기록이 나온다.
(癸亥冬 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常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叫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 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9세종25년 십이월조)
<계해년 겨울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이 글자는 옛날 전자처럼 모양을 본떴고 말소리는 음률의  그 일곱 가락에 들어맞는다. 천‧ 지‧ 인 삼재와 이‧ 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섯 자로서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

셋째. 세종28년(1446) 9월 29일의 기록이다. 이해 9월 상한에 간행한 《훈민정음》 <해례본> <어지>의 기록이다.

是月 訓民正音成御製曰, 國之語音異 異乎中國 与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辱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 易習 便於日用耳)
<이달 임금님께서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시고 가라사대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중국의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측은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말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넷째.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서>에 기록된 내용이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 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 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叫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계해동(1443년. 세종 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보여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다섯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子.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明 正統 8년. 곧 <세종 25년(1443년)12월 30일>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긴하지마는 전환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여섯째. 다음은 <조선왕조실록> <세종신록> 세종 25년(1443년)12월 29일 조에도 위의 <정인지서>에 나오는 글과 똑같은 내용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癸亥冬. 我殿下創製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日訓民正音)
<1443년 계해년 겨울 12월에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일곱째.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끝 문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旴. 正音作而天地萬物之理咸備. 其神矣哉. 是殆天啓聖心而假手諺者乎.)
<아. 정음의 제작에 천지만물의 이치가 모두 갖추어졌으니. 그 정음이 신묘하구나! 이는 거의 하늘이 성인(세종)의 마음을 열어주고 틀림없이 하늘이 손을 빌려 준 것이로구나.>

여덟째. 세종 25년(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이 완성 되었다. 그 때까지 《훈민정음》의 창제를 전혀 몰라 조용했던 조정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정음 완성 다음 해 <조선왕조실록> <세종신록> 세종26년(1444년)2월 20일 조의 기록에 최만리를 비롯한 6인의 《훈민정음》 반대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나온다. 최만리와 6인이 공동으로 올린 상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庚子 集賢殿 副帝學 崔萬理等 上所曰: 臣等伏觀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堪布危懇 謹疏牛後 伏惟惺齋)
<신들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온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들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이 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함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하시옵기를 바랍니다.>

아홉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 26년 1444년 2월 20일. 세종이 최만리의 상소에 답한 내용이다. 이것은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운학에 대학에 대한 학식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니다. 이 기록에서 ‘운서’는 훈민정음을 포함한 음운학적 모든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하여 문자의 그릇된 쓰임을 바로 잡으려는 간접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且汝知韻書乎 四聖七音 子母有幾乎 若非子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네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열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서문>에 기록된 내용이다.

(遂命祥可解釋 以喩諸人)
<드디어 임금께서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하시었다.>

열한째.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서문>에 기록된 다른 내용이다.
(恭惟我殿下 天縱之聖 制度施爲超越百王 正音之作 無所祖述 而成於自然 豈而其至理之無所不在 而非人爲之私也)
<공손히 생각하옵건데 우리 전하는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서 지으신 법도와 베푸신 업적이 모든 왕들을 뛰어 넘으셨다. 정음 창제는 앞선 사람이 이룩한 것에 의한 것이 아니요.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다.>

열두째. 동국정운은 세종 30년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 9명의 학자가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든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만든 운서이다. 신숙주가 지은 <동국정운> 서문의 기록이다.
<이에 사성으로써 조졸하여 91운 23자보를 정하여 가지고 어제하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고. 또 질 물들의 운은 영모로써 래모를 기워서 속음을 따르면서 바른 음에 맞게 하니.>

열셋째. <흥무정운역훈>은 세종이 신숙주, 성상문. 조변안. 김증. 신수산. 5인에게 ,<흥무정운> 언문으로 번역을 명하여 단종 3년 1455년 음력 2월에 편찬한 16권 8책으로 이뤄진 운서 번역 책이다. 명나라 <흥무정운>에 제시된 당시 중국 표준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했는데. 서문을 신숙주가 썼다. 신숙주는 그 서문에서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我世宗莊憲大王 留意韻學 宮硏底蘊 創制訓民正音若干字 四方萬物之聲 無不可傳 吾東邦之士 始知四聲七音 自無所不具 非特字韻而已也)
<우리나라 세종 장헌대왕께서 운학에 뜻을 두시어, 깊이 연구하시고 훈민정음 약간 자를 창제하시니. 사방만물의 소리를 표현하여 전하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 결과 우리나라 선비들이 처음부터 사성과 칠음을 스스로 갖추지 않은 바가 없어서. 그리 특별히 자운이랄 게 없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넷째. 세조 5년(1459년)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이 간행되었다.

 솅 종 엉 젱 훈 민 정 음
<세종이 직접 지은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의 표지와 내제에는 《훈민정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세조 5년에 번역하여 간행한 《훈민정음》 <어해본>의 표지와 내제에는 <솅 종 엉 젱 훈 민 정 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세종이 직접 지은 훈민정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한자 옆에 한글의 음을 조금 작게 붙여 달았는데. 여기에 기록된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이었다.

나) 세종과 집현전 학사의 ‘공동 창제설.
《훈민정음》을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이 공동으로 계획하고 추진하여 만들었다는 ‘공동 창제설’이다. 세종은 음운학의 체계적인 연구나 홍무정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던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다. 어떤 집현전 학사들도 세종보다 권위와 실력이 있는 연구자는 없었다. 그에 버금가는 학자도 없었다.

따라서 세종과 신하가 공동으로 창제하려면. 모든 분야에 걸쳐 서로 동등한 위치의 학식과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세종은 높은 수준의 음운학적 학식과 해박한 사상적 지식과.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철학적 · 학문적 바탕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음운학을 비롯한 문자 창제에 관한 학문에 대하여 전문성이 있는, 세종만큼 잘 알고 있는 집현전 학사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학설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다)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협조를 받아 창제했다는 ‘협조 창제설‘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전 과정을 계획하고. 집현전 학사들은 여러 분야에서 유기적으로 실부를 담당하여 함께 창제하였다는 ‘협조 창제설’이다.
집현전 학사들과의 ‘공동 창제설’ 보다는 학사들이 창제 과정에 덜 개입되어서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세종이 극비리에 직접 만든 위에 집현전 학사들에게 보였다는 주장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다. 따라서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알게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훈민정음》이 완성된 뒤에 여러 신하들에게 보인 것은 《훈민정음》이 이미 창제되었기 때문에 창제 사실이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설사기득권층과 사대부들에게 알려진다 하여도 그 상활에서는 커다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은 《훈민정음》에 대한 모든 설명을 집현전 학사들에게 들려주고 《훈민정음》 해석문 돋. 해례를 쓰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함께 창제하였다라느니 보다는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필요한 해설서 쓰는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 하겠다. 따라서 이 주장도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라)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는 ‘도움 창제설’
세종이 음운학적 이론. 사상적 배경. 철학적 원리 등 중요한 부분은 다 만들고 부수적인 부분은 집현전 학사들이 도왔다는 ‘도움 창제설’이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훈민정음》과 창제 과정은 공개하고 추진한 것이 아니고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여 연구하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은 어느 누구와도 함께 창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나의 예로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7년 1월 7일조를 보면 그 때의 연구 과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 요동에 적거중이던 한림학사이며, 음운학자였던 황찬에게 성상문. 신숙주.손수산을 13차례나 보내어 운서에 대하여 묻고. 발음기호법을 연구하게 하고. 음운학적으로 궁금한 내용을 알아오게 아였다.

그런데 서기서 흥미로운 것은 왜 《훈민정음》이 다 완성된 뒤에 집현전 학사들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십 수 차례에 걸쳐서. 엄동설한 극한의 어려움을 무릎 쓰고 보내야만할 급한 사항이 있었을까? 이것은 《훈민정음》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 아니었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완성을 위한 막바지 진지한 연구 행적이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흠을 덜어보고자 하는 세종의 철저한 목적의식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음운학적으로나. 문자학적으로나. 음성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완벽한 문자이기를 바랐다. 한 점이라도 모순된 내용이 없는 완전한 문자를 만들려는 학자적인 의식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 세종의 명으로 만들었다는 병제설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창제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왕이 조종에서 수많은 국사를 처리하면서 남는 시간를 활용하여 문자를 창제한다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훈민정음》의 창제를 직접 명하여 완성하였다는 설이다.
처음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으나. 세종의 학문과. 능력과. 자질과.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막연한 추측에서 나온 주장이었다. 이론적 근거가 희박하여 오늘날에는 사라진 주장이 되었다.

바) ‘가림토(加臨土) 문자 모방설’이다
고대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가림토 문자 모방설’을 말한다. 이 주장은 앞에 있는 항목 《훈민정음》 창제 기원에 대한 학설에서 ‘가림토 문자 차용설’ 이란 이름으로 언급한 바 있다.

이 주장은 《훈민정음》을 종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로 조작된 주장으로 보고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만으로 《훈민정음》이 가림토 문자를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막연한 주장은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구도 없이 누군가에 의해서 조장된 문자 체계를 보고 《훈민정음》은 창제 될 수 있는 문자가 아니었다. 음운학적으로 사상적으로 빈틈없이 만든 완벽한 문자였다. 그렇게 때문에 제자의 원리도 없고. 사상적인 배경도 없으며. 역사적인 유물 하나 없는 문자를 누가 믿고 모방하겠는가?
이들이 근거로 삼는 <환단고기>는 필사본으로 전해오고 있다. 가죽이나 나무를 이용하여 기록을 남겼던 한대(漢代)  이전의 기록물들은 모두 돌이나 쇠붙이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4200년 전(BC 2181년)에 가죽이나. 종이나. 비단에 필사된 <환단고기>의 문자설을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가람토 문자는 그 글자의 모양이 《훈민정음》의 자모와 너무나 유사할 뿐만 아니라. 자모의 체계 또한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훈민정음》과 거의 일치함을 알 수 있다.
문자의 존재 이유가 기록을 위한 것이라면 마땅히 가림토 문자로 기록된 역사적인 기록이 전해오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림토 문자로 기록된 고대 유물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문명 후세 사람에 의해 종교적인 목적으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보고 포장한 가치 없는 기록일 뿐이다.

4. 《훈민정음》 창제는 어떤 사람이 해야 하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주도 아래 이뤄진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였다. 말과 일치하고 완벽에 가까운 표현이 가능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상상외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창제자의 여러 가지의 조건과 덕목과 환경이 갖춰졌을 때에만 이룰 수 있는 까다롭고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첫째. 사상적으로 성리학과 역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학자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음운학적으로나. 문자의 창제 원리에 대해서나. 어떠한 경우라도 논리적으로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배경이 되고,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한 글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설명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춘 학자여야하기 때문이다.

둘째. 음운학적으로 중국의 <절운 601>. <광운 1008>. <예부운략 1037>. <고금운회 1292>. <중원음원 1324>. 홍무정운 1375>과 같은 운서를 오랜 세월 동안 정통으로 탐구하고. 깊이 천착(穿鑿)하고. 최고 수준의 음운 연구에 업적이 있는 학자이어야만 한다. 또한 각종 자전의 자의와 자음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하여 해박한 한자 · 한문에 대한 지식이 충만한 학자이어야만 한다.

셋째. 한자 · 한문을 포함한 주변국의 여러 언어와 문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는 음성학. 음운학, 문자학에 조예가 깊은 식자여야 한다.
당시 조선 주변 나라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의 중국어와 한자 · 한문을 비롯하여 인도의 범어. 일본의 일본어와 가나문자. 만주의 여진어와 그 문자(만주문자). 몽골의 몽골어와 파사파 문자. 티베트의 티베트어와 문자. 위그르어와 그 문자. 측천무후 때 새로 만들어 썼던 측천문자, 말의 존재 유무를 모르는 가림토 문자 등이 있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려는 세종과 곁에서 함께 연구하는 학자들은 당연히 주면 국가들의 언어와 문자들에 대하여 많은 분석을 했을 것이다. 특별히 문자의 형태와 기능에 대하여 분석하고 적용하여 보았을 것이다. 그들이 모든 언어를 능통하게 말할 수는 없더라도 발음되는 성음과 음운의 분석 정도는 활발하게 연구했을 것이다. 그 예로 당시 요동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음운학자 황찬에게 자운을 알기 위해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 성균관 주부 성삼문. 행사용 손수산을 13차례나 방문하게 하였다. 이 사실은 그들이 주변 국가들의 문자에 대한 음운. 음성. 음절. 음소. 음가. 필사법. 사성. 성음 등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넷째. 세로 창제될 문자 《훈민정음》의 미래에 대해 원활한 활용과 기능. 적용을 훤히 예측할 수 있는 예지와 지식을 갖춘 현자이어야 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부터 이미 새로 만들어진 문자가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무리 없이 원활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말과 새로 만든 글자가 서로의 표현을 완전하게 도울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을 것이다. 세종에게 새로 만들 문자에 대한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렇게 단계별로 계획성 있게 진행할 수도 없었고. 그토록 완벽에 가까운 문자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다섯째. 왜 문자를 만들려는가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창제되었다. 한자와 한문을 배우고 익히는 데는 10년 이상의 많은 시간과 경제적 여건이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한자와 한문은 우리말을 담기에 적합한 문자가 아니었다.
세종에게는 마땅히 우리말에 맞아 배우기 쉽고. 익히기 편한 문자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형편이 이려운 백성들이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문자 환경을 조성하자는 목적이 있었다.

여섯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위하는 애민의 덕목을 갖춘 최고의 권위를 가진 통치자여야 한다. 현재의 문자생활이 다소 불편하지만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것도 아닌데 굳이 문자 창제라는 어려운 일을 추진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백성을 사랑하는 덕목을 지닌 군왕이라면 원활한 통치를 위하고 백성의 형편과 처지를 고려하여 일관성 있게 거사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하려는 사람은 위에 기록된 조건이 하나라도 갖춰지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험난한 길이었다. 몇 년 사이에 몇몇이 모여서. 대충 연구하여 완성할 수 있는 가벼운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이 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유능하고 철저한 학자들을 모아 주도면밀하게 처리해 나가야만 가능했던 일이였다.
세종은 절대적인 군왕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겸허한 자기희생의 정신으로 백성들을 위하여 최고의 문자를 아주 어렵게 창조하였다. 성군만이 할 수 있는 어질고. 슬기롭고. 거룩한. 통큰 통치자였다.

5. 세종은 《훈민정음》을 왜 창제하였는가?
세종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마친 후. 세상에 새 문자 창제를 알렸다. 온 나라가 다 함께 모여 축제를 열고. 이 위대한 역사적인 행사를 기려야만 했다. 그러나 세종은 내면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훈민정음》의 창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남의 일 다루듯이 실록에 간단하게 몇 줄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세종이 그토록 20년 가까이 애써서 만든. 목숨을 바쳐서 죽을 각오로 만든 《훈민정음》이었다.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의 창제는 반포 이후로 백성들의 언어와 문자생활에 엄청난  충격과 혁명적인 변화를 수반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세종은 그런 줄 알면서도 온 나라가 들썩거릴 창조의 행사와 반포의 축제 잔치도 치르지  않았다. 매우 간략하게 남의 일 구경 하듯이 신록과 해례본 등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25년 (1443년 12월 30일 초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 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 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叫七調. 三極之義. 二氣之妙. 莫不該括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而要 精而通)
계해동 아전하창제정음이십팔자. 략게예의이시지. 명왈훈민정음상형이자방고전. 인성이음규칠조. 삼극지의. 이기지요. 막불해괄 이이십팔자이전환무궁 간이요 정이통)
<계해년 겨울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이 글자는 옛날 전자처럼 모양을 본떴고 말소리는 음률의 일곱 가락에 들어맞는다. 천‧ 지‧ 인 삼재와 이‧ 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섯 자로서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

세종은 목표가 정해지면 강력한 추진력으로 그 일을 이루고 마는. 그리고 불굴의 의지로 난관을 헤치고 나가 관철시키고 마는 신념의 군주였다. 품성이 어질고. 사고와 처신이 현명하고, 판단과 결심이 조화로운 지예의 왕이었다.
정치적으로 통치하는 지배계급들과. 기득권층인 양반 계급들과. 식자층인 귀족 사대부들의 반대가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면서 드러내 놓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를 알릴 수는 없었다. 그러면 세종이 《훈민정음》을 왜 창제했을가? 그 까닭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 글자를 못 읽어 억울함을 당하는 일반 서민들의 고충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세종은 백성의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제왕의 권위 보다는 인간미를 앞세우는 성군이었다. 그의 국정 통치철학 바탕에는 애민정신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특별히 글자를 못 읽어 소송에서 억울하게 패하는 일반 서민들이 고충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다.

세종이 그렇게 생각할 즈음 1428년 진주에 사는 김화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조정에서는 강상죄 곧.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심하게 위반한 죄이기 때문에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세종은 엄벌에 앞서 백성들을 선도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는 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얼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악행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어려운 삶으로 인한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그림으로 만든 국민교화서적을 편찬하기로 결심하였다.

세종은 세종16년 (1434년)에 직제학 설순에게 조선과 중국의 서적에서 군신. 부자. 부부의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의 행실을 모아서 그림과. 글과 시로 책을 편찬하라고 명을 내렸다.
이런 모범적인 선행을 항상 보고 읽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만든 양반과 평민 모두를 위한 국민교화 서적이 삼강행실도였다.

삼강행실도는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1432년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서문은 맹사성과 권채가 썼다. 이 책은 세권으로 나뉘어 있다. 3부작 중에서 제 일권 삼강행실충신도에는 113명의 충신과. 제 2권 삼강행실효자도네는 110명의 효자와. 삼강행실열녀도에는 95명의 열녀가 소개되어 있다. 본문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넣어 사실의 내용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하였다. 중국의 인물들이 중심이었고 조선의 인물은 충신6명. 효자4명. 열녀 6명으로 그 수효가 매우 적었다.
아무리 안견과 같은 유명한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하여도 그림만으로는 생각이나 사상을 온정하게 전달할 수가 없었다. 기록된 글을 읽자마자 그 뜻을 알고 느낄 수 있는 문자보다 좋은 순 없었다. 그래서 세종은 우리말에 꼭 맞는 쉬운 소리글자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둘째. 한문의 이중적 문자생활의 불합리를 청산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 당시에 한자 · 한문으로 우리말을 기록하는 문자 체계는 둘이었다. 하나는 한자 · 한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두였다. 두 문자 체계는 그 바탕이 한자였기 때문에 삶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뜻글자 곧 표의문자인 한자 · 한문은 우리말의 음운 체계와 문자체계가 전혀 달랐고. 대표적인 뜻글자여서 한 자 한 자가 고유의 의미가 있고. 독립된 고유의 발음이 있다. 그래서 중국어와 한자는 동음이의어가 많은 것이며. 그로 인해 말과 뜻을 구분하기 위한 성조가 필연적 발달하였다.

실제 생활에서 한자 · 한문은 자형도 복잡하고 특수 훈련이나 기술이 없으면 익히기도 힘들고. 배우는 기간도 길며. 학습에 필요한 경제적 부담 또한 만만치 않았다. 한자 · 한문을 잘 아는 극히 일부의 양반계급 기득권층만이 모든 정보와. 기술과. 지식과. 삶의 지혜를 독점하여 사용하고 전달하였던 것이다. 사대부. 기득권층. 양반 계급. 그들만이 생활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세종은 이들의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아주 싫어하였다.

한자 · 한문은 한번 익히면 누릴 수 있는 분야가 많았다. 젊어서 익히면 죽는 날까지 아무런 불편 없이 사용하는 것이 한자 · 한문이었다. 고체시. 당시 곧. 금체시인 한시를 짓고. 사(辭) · 부(賦) · 설(設) · 서(敍) · 가(歌) ·병려문 등의 문을 쓰거나 지으며 멋진 문자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단계까지 이르기란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한자 · 한문의 이런 문자생활은 세종이 가장 기피했던 문자 체계였다.
우리말에 맞는 새 문자는 소리글자 곧. 표음문자이어야 하고. 읽기 간편하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고. 이해가 빨라야 했다. 그래서 세종은 모든 소리를 다 적을 수 있는 쉬운 소리글자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셋째. 음과 훈을 원칙 없어 쓰는 이두의 불일치한 문자체계를 바로 잡으려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세 번째의 해결책으로 차자표기법인 이두로 번역을 시도하여 법률체계 정비하려 하였다. 신라시대 설총에 의해 고안하여 법률체계 정비하려 하였다. 신라시대 설총에 의해 고안되어 널리 쓰였던 이두는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서 글자로 썼다. 글자는 한자로, 문장은 이두의 특수 문장 체계로 이뤄진 차자문자 체계였다.
이두는 다른 말로 제왕운기에서는 ‘이서’라 불렀고. 대명률직해에서는 ‘이도’라 불렀고. 문헌에 따라 ’이도‘ ’이두‘ ’이토‘ ’이찰‘.’이문‘ 등으로 불렀다. 문자체계의 혼란만큼이나 명칭 또한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다.

이두는 그 쓰임에 따라 네 가지가 있다.
첫째. 구렬식이다. 구결은 ‘입겿’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사나 용언처럼 훈토로 쓰이는 표기법이다.
둘째. 서기식이다. 임신서기석에 쓰였던 총74자의 한자의 배열을 방식이다.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하여 국어 문장투로 쓴 표기법이다.
셋째. 이두식이다. 훈토를 좀 더 통일시켜 실용적인 산문이나 서류에 많이 쓰인 표기법이다. 넷째. 향찰식이다. 이두에서 가장 발달한 표기법이며. 노래를 적을 때 많이 쓰였다. 사뇌가 곧. 향가를 적을 때 썼던 표기법이다. 또한 고려 초기까지 행가를 적을 떼 쓰였던 가장 발달한 이두 형식은 향찰식이었다.
문자가 없었던 라말려초에 많이 쓰였던 이두는 향가 및 문장을 짓는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문장을 짓고. 문장을 해석하는 것은 한문보다 더 어려웠고 불편하였다.
이두는 한자 · 한문의 또 다른 문자 형태여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가 될 수 없었다. 우리말에 필요한 글자는 뜻글자가 아닌 소리 글자여야 하기 때문에. 전혀 어울릴 수 없는 한자 · 한문이나 이두로는 그 음과 뜻을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말에서 이두는 무용지불이었다. 라말. 려초에 한자 · 한문을 능수 능난하게 사용했던 식자층에서만 국한적으로 쓰이다가 사라졌던 것어럼 세종조에도 그 비효율성 때문에 중도 폐기도고 말았다.
그런 까닭으로 세종은 한자 · 한문이나 이두가 아닌 우리말에 꼭 맞는 쉬운 소리글자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넷째. 백성을 잘 가르쳐 원활한 통치를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국가의 경쟁력은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과. 계획과. 지시사항을 신속하게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알게 하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 된다. 국가는 중요한 시책을 적절한 시일 안에 하달하고. 국민은 빨리 그리고 바르게 그 내용을 파악하여 소통하고 상달하는 선순환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때. 그 국가의 힘은 배증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시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교육하고. 홍보하는 일을 말로만 전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에게 모든 시책을 그림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성사 전달이 됐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알리고. 알게 한다는 것이 온전한 소통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세종은 백성들이 문자를 몰라서 서로의 생각이 불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행정의 공백으로 인하여 국가의 통치가 원활하지 못한다는 형편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어려운 일을 만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갑갑함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가엽게 여기고. 긍휼히 여기며 몹시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것뿐이라고 행각했다. 이런 세종의 백성 사랑의 마음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다섯째. 민족적 자긍심과 지주정신을 들어낼 문자가 필요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천성이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과 독창성을 지닌 강력한 군주였다. 나와. 우리와. 내 나라에 대한 자존감이 한 차원 높게 구별되는 탁락한 군왕이었다. 그는 남다르게 천품이 총민하여. 그가 관심을 갖는 모든 학문에 통달할 정도로 독실한 지혜의 왕이었다.
세종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숭상했던 성군이었다. 엄청난 독서가 바탕이 되어 모든 학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예지가 있었다. 그의 통치 기간에 편찬. 간행된 저술을 보면 그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은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외교. 군사. 국방. 무기. 종교. 법률. 과학. 철학. 사상. 정신. 성리학. 음운학. 음성학. 문자학. 문학. 음악. 출판. 천문. 역사. 지리. 음악. 도덕. 예의. 농사. 의약 등의 저술이 재위기간 동안 쉬지 않고 출간되었다.
세종은 세상의 이치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었다. 나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어렵고 힘든 일을 보살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공부해도 다 못 배우는 글자와 글이 한자 · 한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쉬운 글자를 만들어. 읽지 못하고. 쓸 수 없는 백성들의 한을 풀어주려고 노력을 다했다.

여섯째. 중국 한자음과 일치하고 와전 한자음의 정확한 표기를 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우리 겨레는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한자를 문자로 사용하면서 살아왔다. 우리말은 물론 한자의 발음을 기록할 문자 없이 구전으로만 말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조화의 언어와 문자생활을 해왔다. 반절을 이용하여 발음을 기록하였고. 차자표기법인 이두를 활용하여 생각과 뜻을 기록하였다지만 그것은 완전한 표기법이 될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국의 한자 발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 불통의 단계까지 이르렀다. 세종은 운서 <흥무정운>를 연구한 학자 군주였다. 중국의 한자음이 변질된 것을 세종은 문자의 타락으로 여겼다. 더 이상 변질되기 전에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새 문자 창제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그 연구를 계속하였던 것이다.
먼저 우리말에 꼭 맞는 문자를 만들어 언어 문자 생활의 불편을 제거하고. 편리한 의사소통은 물론 사상과 기술을 바르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다음은 와전 한자음을 정리하여 정확하고 바른 한자 ·한문의 사용을 목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 예로 ‘이영보래’라든가. 초성에 옛 ‘ㆁ’을 사용한 것이라든가. 받침 없는 한자어에 이응 자음을 붙여 초 · 중 ·종성의 완전한 구조를 이루려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표기법을.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이라 말한다.
여하든 《훈민정음》의 창제는 두 가지 목적을 다 이루었다. 그리고 <운회>. <동국정운>. <홍무정운역훈> 등의 음운학 관련 서적들은 《훈민정음》 창제의 목적과 이유를 반증하는 결과물들인 것이다.

일곱째. 여러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종은 즉위 하자마자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전문서적을 편찬하였다. 해당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유용한 저서들을 편찬하였다. 각종 귀중한 서적 자료들을 쉬운 글자로 기록하면 그 효과가 배증함을 누구보도 세종은 잘 알고 있었다. 편린이지만 아래의 목록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는 한자· 한문으로만 책을 펴냈다. 창제 후에는 많은 분야에 《훈민정음》 사용하여 책을 펴냈다. 재위할 동안 계속해서 《훈민정음》과 관련된 저술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걸쳐 저서를 계속 편찬하고 간행하였다. 모든 저술을 다 기록할 수 없어 대표되는 저술 일부만 적어 보았다.
세종10년 <효행보> 간행(유교의 윤리와 의례)
세종11년 <농사직설(農事直設)(농업서적)
세종14년 <팔도지리지>(지리서)
세종15년 <향(鄕)락(樂)집성(集成)방(方)>(유교의 윤리와 의례)
세종16년 <자치동감훈의>(역사해설서)
세종22년 <국어보정>(중국 역사서)
세종23년 <명황설람>(중국 정치 귀감서)
세종24년 <종론전집>(중국 법률 서적)
세종25년 《훈민정음》창제 (음력12월 29일 필사본 완성 기록)
세종25년 <주시저가주석> (중국 문학)
세종26년 <운해언해>(한글 번역서)
세종26년 <오체의주>(유교 윤리 의례)
세종27년 <치평요람>(정치귀감서)
세종27년 <용비어천가> 편찬(조선개국 찬가. 악장체 문학)
세종27년 <용비어천가주해> 완성(해설서)
세종28년 《훈민정음》 반포(음력 9월 상한 목판본 간행)
세종29년 <용비어천가> 간행(목판본. 악장체 문학)
세종29년 <동국정운> 간행(한글 운서)
세종30년 <사서언해> 유교 경서)
세종31년 <석보상절> 간행(시가)
세종31년 <월인천간지곡> 간행(시가)
문종 1년 <고려사> 편찬(역사서)
단종 3년 <홍무정운석훈> 간행(중국 운서 번역서)
단종 5년 <월인석보> 간행 (시가)
세조 5년 <훈민정음 언해본> <월인석보본> 간행(번역서)
세조 7년 방암경언해 간행(시가)
등이 이 시기에 간행되었던 대표적인 전적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우리 글자로 기록하기 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던 것이다.

여덟째. 모든 말과 소리를 바르게 쓰고. 쉽게 배우고. 빨리 읽고 널리 가르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세계 최고의 언어학자들은 세계 모든 문자들 중에서 《훈민정음》 곧. 한글이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독창적이고. 체계적이고. 실용적이라고 분석해 놓았다.
그토록 모자람이 없이 창제된 자랑스러운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빨리 읽을 수 있으며. 폭넓게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쓸 수 있고. 아무에게나 구별하지 않고 널리 가르칠 수 있으며. 많은 지식을 깊이 알게 하여.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하고, 그리하여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고 여유 있게 해주는 글자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 모자람 없는 완벽한 새 문자는 이렇게 창제된 것이다.

아홉째. 유교의 대표적인 덕목인 충. 효. 예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고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운 조선의 통치 철학은 유학이었다. 그 중에서 객관적 유심론인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다. 성리학은 성명의리학의 준말로. 공자와 맹자를 도통으로 삼는 유학의 한 계통이다. 북송의 정호 정이와 남송의 주희에 의해 완성된 유학 사상으로 성명과 이기와. 의리 등으로 형이상학의 체계를 해석하였다.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왜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을까? 역성혁명에 참여한 고려의 성리학자들은 고려의 국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그 폐단을 시정하고 사회윤리를 강화하며. 국가의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인 성리학을 국가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천성을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성은 본질적으로 믿을 수 있으며. 수련하고. 교정하고. 노력하면서 선한 본성에 완전하게 이룰 수 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성리학은 사회의 기존 질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수학과 교육에 의해 신분을 간직할 수 있으며. 단계적인 계층관계를 유지하기에 매우 적합한 학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리학은 정치 체제유지에 알맞은 통치 학문이요. 이념이었다.
성리학에서는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기질은 성에 따라 모든 인간은 개별적으로 다 다른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성리학은 인간의 본연의 성질인 성명은 인간 실재의 본질. 구조. 존재 근거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이론체계로 여기고. 정치를 할 수 있는 성인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지향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성리학은 조선 500년 동안의 통치 이념이었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과정에서는 많은 부분에 걸쳐 철학적 배경 사상이 되었다. 제자원리에도. 음운학의 전개 과정에서도. 음성학의 응용에도 바탕이 되었고.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은 공맹의 도통을 잇는 유학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의 기본으로서 강조한 삼강 곧. 새가지 덕목으로 군위신강. 부위자강. 부위부강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세종은 나라에는 충성하고. 부모에게는 효도를 다하며. 부부에게는 예절이 있게 하려면 백성 모두가 쉽게 배우고 편히 쓸 수 있는 문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훈민정음》은 창제되었던 것이다.

6. 《훈민정음》은 왜 극비리에 창제했을까?
국가의 공식 문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는 국책사업일 뿐만 아니라. 언어와 문자생활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가 수반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나라의 모든 힘을 모아 공개적으로 함께 만들어야할 모든 과정을 비공개로 하고 극비리에 만든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후대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모화사상과 사대주의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중국의 한자가 필요 없는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혁명과 같은 엄청난 일이었다.

따라서 세종을 중심으로 최측근들만으로 극비리에 진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왕실의 왕자들과 공주들이 중요한 역할을 서로 분담하여 도왔던 것이다. 온 나라 백성들의 합리적인 문자생활을 위한 엄청난 형명적인 사건인데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숨어서 진행해야만 했다. 이 같은 암약적 행동은 《훈민정음》의 창제 의도와 목적이 겉으로 드러날 경우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역설적인 행동이었다.
명나라에서 볼 때 《훈민정음》의 창제는 한자 · 한문에 대한 언어문자적인 문제에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남의 나라의 모든 일을 일일이 간섭하고. 트집 잡고 시비를 거는 중국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종은 자신의 최대 업적이면서 우리민족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혁명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의 창제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거의 없다. 언재부터 만들기 시작했는지. 구체적인 창제 동기는 무엇인지. 누가. 누구에 의해서 진행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 졌는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심지어 세종의 단독 연구로 만들어진 것인지. 집현전 학사들과의 공동으로 창제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훈민정음》 창제과정의 전후 사진을 살펴보면 그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 25년(1443년) 12월 29일조에 《훈민정음》의 창제를 집현전 학사들에게 그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이전의 신록에는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신록 어디에도 추론이나 짐작할 만한 문구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집현전 부재학이었던 최만리마저도 이때 창제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늦게사 안 최만리와 6인은 해를 넘기고 2월 20일에 합동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그러면 왜.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극비리에 만들어야만 했을까?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지금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근거가 될 만한 여러 기록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여러 정황들을 고려하면 그 까닭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훈민정음》의 창재는 중국 명나라에서 볼 때. 한자 · 한문에 대한 언어와 문자에 대한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외교적으로 마찰을 불어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명나라에서 생각할 때 한자문화권의 권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은밀하게 연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드러내 놓고 새로운 문자를 창제할 수 없었다.

둘째. 당시는 사대주의 모화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그들은 중국과 문자생활을 함께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주체적인 문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대할 그들이었다. 그러면 시대적인 상황과 사회적인 반발과 저항을 무마시키고 피하는 방법은 비밀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셋째. 당시 명나라는 조선의 모든 정사를 일일이 은밀히 감시하고. 사사건건 간섭하였다. 대외적으로 대내적으로 까닭 없이 트집 잡고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중국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래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극비리에 할 수밖에 없었다.

넷째. 세종이 왕위에 오른 해는 1418년으로. <조선>이 건국한지 26년 밖에 안 된 신생국이었다. 건국 초기의 험난한 국제정세 속에서 위험을 무릎 쓰고 중국에 대항하는 의지기 드러나는 문자 창제를 알릴 수는 없었다.

다섯째.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대와 기득권층의 조직적 비협조와. 양반 계층의 무관심으로 새로운 문자의 창제가 무산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세종은 비밀을 철저하게 유지해야만 했고. 혼자서 신 문자 창제를 위한 힘들고 어려운 절차탁마를 계속해야만 했다.

여섯째. 세종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집현전 학사들과 공동 작업으로 했다면. 창제의 모든 과정을 공개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이 있다지만 세종의 음운학적인 학문적 자질에 버금가는 식견이 있는 학자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도움을 받을 수도 없으면서 국가의 귀중한 비밀 프로제트만 드러나게 하여 문제를 야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일곱째. 세종에게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국책사업인 새로운 문자 창제와 반포의 어려운 모든 과정을 장기간 중간 없이 극비리에 진행해야 한다는 난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할 최적의 방법은 자녀들인 세자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그리고 정의공주와 함께 궁중 심처에서 연구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면 비밀도 유지할 수 있고. 문자 창제에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여덟째. 세종은 산적한 국정현안의 원만한 처리를 무시하고. 문자 창제만을 위해 매달릴 수 없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낮에는 조정에서 많은 국사를 처리하고. 밤에는 새 문자 창제의 대역사를 위한 연구를 병행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새로운 문자의 모든 창제 과정에서 철저한 비밀을 유지하면서 연구에 몰두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세종은 묘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구종궁궐에서 신뢰할 수 있는 네 자녀 곧. 세자 향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의 도움을 받으면서 문자 창제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궁중에서의 직업이었기 때문에 비밀을 충분히 유지할 있었으며. 새 문자가 완성될 때까지 편안하게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었다.

아홉째. 《훈민정음》의 창제가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하층 계급의 신원을 위한 것이라면. 그들을 착취하고 다스리는 양반 계층의 경제적인 손실이 많아짐은 말할 것도 없고. 처지와 형편이 어려워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였다. 세종은 사대부. 기득권. 그리고 양반 계급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훈민정음》의 연구과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극비리에 창제 작업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열째. 세종은 육식 위주의 식습관과 운동 부족을 인하여 중년 이후 성인병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세종 18년(1436년)40세 나이에 소갈증이라 부르는 당뇨병과. 고혈압과 비만. 시력의 급격한 저하 등 건강의 약화로 몸져누워야만 했다 이것은 나아의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세종은 이러한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조정의 일반 업무는 세자에게 이양하여 처리하는 권한 곧. 섭정할 것을 시도하였다. 물론 조정의 반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사연이 숨어 있다 심정의 표면적인 이유는 건강이지만 실제로는 문자창제를 위한 시간 벌기 작전이었다. 이 또한 비밀 유지를 위한 세종의 계책이었다.

열한째. 세종은 육조에서 왕에게 현안을 직접 보고하는 ‘육조직계제’에서 의정부 삼 정승이 육조의 업무를 먼저 검토하고 난 뒤 왕에게 보고하는 ‘의정부서사제’로 바꾸었다.
이렇게 조치한 것은 언어에 꼭 맞는 문자 연구와. 창제와. 반포를 위한 작업을 천착하기 위한 결단이요. 선택이었다. 세종은 행정조직의 개편을 통하여 문자 연구를 위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열두째. 세종은 젊어서부터 너무 많은 독서로 인하여 시력이 좋지 않았다. 특히 《훈민정음》을 완성한 뒤. 그의 말년에는 사람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에 다급한 세종은 시력의 회복과 안질을 치료하기 위하여 오늘날 충북 초정리라고 부르는 초수리 약수터로 행차를 결행하였다.
세종의 행차는 세종 26년(1444년) 2월 28일 경복궁을 출발하여 3월 2일에 초수리에 당도하였다. 300km의 그 먼 거리를 행차하여 단 5일 만에 도착한 것이다. 경호실장의 과로사를 감수하면서까지 초수리로 멀리 떠난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한양의 사대부들과 기득권 세력들의 시선을 피하고. 시간의 여유로운 활용을 위한 계책이었다.
세종은 충청북도 청원군 초수리 행차 외에도 여러 이유를 들어 훈민정은의 창제에 이어 반포에 필요한 시간으로 활용하려는 시도와 선택에 집중하였다.

7.《훈민정음》창제와 반포에 참여한 사람들
가 세종과 《훈민정음》 반포에 참여한 자녀들의 나이와 직책


이름
직책
나이
생몰연대
비고
1
세종대왕
임금
50세
1397~1450
이도
2
이향
왕 세자
33세
1414~1452
문종
3
정의공주
공주
32세
1415~1452
차녀
4
이유
수양대군
30세
1417~1468
세조
5
이용
안평대군
29세
1418~1453
4남


나) 《훈민정음》 창제시 집현전의 직책과 나이


성명
직책
나이
찬반여부
관직과 품계
1
정인지
집현전 학사
47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대제학 정2품
2
최항
집현전 학사
34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응교 정4품
3
박팽년
집현전 학사
25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부교리 종5품
4
신숙주
집현전 학사
25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부교리 종5품
5
성삼문
집현전 학사
24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수찬 정6품
6
강희안
집현전 학사
45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주부 정6품
7
이개
집현전 학사
25세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부수찬 정6품
8
이선로
집현전 학사
?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 참여
부수찬 정6품
9
최만리
집현전 학사
36세
훈민정음 반대 상소
부재학
10
신석조
집현전 학사
36세
훈민정음 반대 상소

11
정찬손
집현전 학사
41세
훈민정음 반대 상소

12
하위지
집현전 학사
31세
훈민정음 반대 상소


8.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갑자상소>에 대하여
집현전 부제학인 최만리를 비롯한 6인 곧.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견이 1444년 (세종20년) 2월 20일에 합동으로 《훈민정음》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이미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그들이 역사적으로 .갑자상소‘라고 부르고 있다.
최만리를 비롯한 여섯 사람이 함께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훈민정음》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전혀 모른 상태에서는 반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훈민정음》을 반대한 이유는 이렇다.

첫째. 《훈민정음》의 창제는 중국을 섬기는 시대주의에 어긋나며 오랑케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세종도 《훈민정음》 창제는 중국과 한자 사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것을 따르되 우리의 것을 찾고 지켜나가자는 것이었다.

둘째. 《훈민정음》이 학문 연구와 그 정진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학문의 발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고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의 쉬운 문자 생활을 통해 억울한 죄인들을 구제하고 교화할 수 있다고 여겼다.

셋째. 문자를 몰라서 억울한 죄인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관리가 죄인을 공평하게 다루지 않아서 생기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이 매우 실기하고 기묘하며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이해할 수 없는 엉뚱한 주장을 했던 것이다.

<갑자상소>. 그러니까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반대했던 상소사건은 그들이 얼마나 어문정책과 문자생활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지도자로서. 고위의 관리로서 민족적 주체성이나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 편협한 의식을 가진 부적격의 사람들이었다.

최만리를 비롯한 6인의 《훈민정음》 반대 주장은 중화라는 시대적 세계관과 양반이라는 기득권자들의 위상을 수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입장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 문자 창조 진행 과정은 순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들은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과정은 대외적으로 중국과의 관계에서 엄청난 외교적 마찰과 갈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고. 대내적으로도 사대부들의 저항과 양반 계층과 평민 간에 심각한 문제와 갈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어려운 사회적인 여건을 감안하여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을 살펴보면 이 작업이 얼마나 과감했고. 위험했으며. 어렵고. 무모하리만치 현실에 맞지 않는 힘든 과정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종이 전체적으로 통솔하고. 그 아래 집현전 학사들 곧. 대제학 정이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을 중심으로 치밀하고. 신속하며. 심혈을 기울여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창제는 공개적으로 진행할 수 없는 비밀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기적이며. 조직적으로 활발하게 움직여서 이뤄낸 지상 최고의 문자 창제이며. 문화혁명이었던 것이다.


9.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그 반포
집현전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국왕과 신하가 함께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여 유교적 교양을 쌓는 경연과 차기 왕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우리말에 맞는 우리 글자를 만든다는 것. 곧 《훈민정음》의 창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문화권익 권위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은밀하게 연구해야만 했다. 온갖 위험한 과정을 무릅쓰고 견디기 힘든 난관을 혜치고. 실현 가능한 모든 원리를 적용하고. 학문적 지식을 유기적으로 공유하고. 소통하며. 탐구하여 나갔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문자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가치와 의미와 원리가 담긴 최고의 기록문자인 《훈민정음》 창제를 위해 몸과 맘과 혼을 다하여 궁구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현군 세종의 언문일치의 자주정신과 가치지향의 실용정신을 품고 심오한 우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숭고한 사상이 담겨있다.
세종과 “언문팔유는 그들의 문자 창제 의도에 따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와 원리가 깃든. 문자의 효용성을 극대화시킨 완벽한 문자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되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쉽게 배우고. 익히기 쉽고. 쓰기 편한 언어 문자 생활이 세종대왕에 의해. 세종 28년(1446년)부터 시작 되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자.
전술한 것처럼 《훈민정음》은 세종25년(1443년 12월 29일에 창제 되었다. 그리고 ‘문자로서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을까’ 라는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3년간의 시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말과 창제 문자 《훈민정음》이 완전하게 합치된다는 전혀 손색이 없고. 훌륭하다는 검증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세종은 창제자로서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상한에  《훈민정음》을 온 세상에 반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민족은 비로서 우리말에 맞는 우리 문자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말과 완전한 문자가 합치된 이상적이며 편안한 언문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책 속에는 새롭게 만든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을 비롯한 학자들의 이름과 목적. 동기. 원리. 이유. 의의. 사상. 정신. 배경. 기능. 규정. 해설. 예시. 사용방법. 형편 등을 물셀 틈 없이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만 해도 음소문자인 《훈민정음》은 그 낱낱의 음소를 어떻게 조합해야 문자가 되는 지가 큰 관심거리였다. 그 시대는 중국의 한자 · 한문으로 문자 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당시 사대부 양반 귀족들은 중국 한자와 한문만으로도 모든 언어에 구태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 이유도. 필요도. 가치도 없다고 여겼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이처럼 생소한 문자를 왜 만들려 하는지 모르겠다’ 고 엄청난 불편함을 토로하였다.

세종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자기의 백성들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문자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세종은 우리말과 새로 만들 글자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고. 완전하게 일치하여 언문생활에 전혀 불편이 없기를 바랐다. 그런 배경을 안고 《훈민정음》 창제의 대업은 시작되었고. 다양한 실험과 세밀한 관찰과 천착을 계속하였으며.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완성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이 완성 된 후에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문자로서의 서사 실험과 문장으로서의 표현기능 실험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종 27년(1445년) <용비어천가>의 편찬은 창제 문자 《훈민정음》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험과정이었다. 《훈민정음》의 첫 열매인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이 문자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최후 점검 수단으로 만들어진 시험용 악장체의 시가 문학이었다. 《훈민정음》으로 지어낸 <용비어천가>는 우리문자로 기록된 최초의 창작 문학 작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훈민정음》의 간행(1447년)은 한글의 역사와 국문학의 역사에서 단순한 기록문학 작품이 아니었다. 일상의 의미와 가치를 뛰어넘는 북극성과 같은 귀중한 문자 기록물임과 동시에 빼어난 문학적 가치를 지닌 걸작의 악장체의 문학작품이었다.
완성된 《훈민정음》은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에 의해 실용성 여부에 대한 철저하고. 세밀하고. 엄격한 검증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 결과 ‘언문이 완전하게 일치한다’ 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훈민정음》이 우리말의 문자로서 아무런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정도로 모든 조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드디어 세종은 세종28년(1446년) 《훈민정음》을 온 천하에 반포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은 사대부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정식 문자로써 실생활에서 사용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 반포 당시의 한글 자형은 우리민족 문자예슬에서 최고의 한글 서예 · 한글 서체가 되며. 한글 손글씨(Calligraphy)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0.《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조
가) <해례본>의 구성
훈민정음 - (표제)

■(가) 훈민정음 (대체)
1) 정음편- (판심체)
가) 어제서문
나) 예의

■ (나) 훈민정음해례- (내제)
1) <정음해례> 편-(관심제)

■ 가) 제자해
■ 나) 초성해
■ 다) 중성해
■ 라) 종성해
■ 마) 합자해
■ 바) 용자례
■ 사) 정인지서 - (내제가 없고 용자례에 이어져 있음)
■ 훈민정음- (마지막 면. 끝줄에 특별한 의미 없이 기록되어 있음)

■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내제임

나) <해례본> 실제의 내면 구성
■ 훈민정음 – <책표제>
■ 훈민정음 –1면<내제>
세종이 쓴 <어제(세종) 서문 – 1면
세종이 쓴 <예의 – 1면 ↔ 7면

■ (훈민정음해례) -9면<내제>

■ 제자해 –  9면 ↔ 36면
■ 초성해 – 36면 ↔ 38면
■ 중성해 – 38면 ↔ 42면
■ 종성해 – 42면 ↔ 48면
■ 합자해 – 48면 ↔ 56면
■ 용자해 – 56면 ↔ 60면
정인지가 쓴 서문 60면 ↔ 66면
■ 훈민정음  66(끝면 제목)

마지막 면. 끝줄 맨 위에 특별한 의미 없이 ‘훈민정음‘이라는 제목이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것은 처음과 끝을 《훈민정음》으로 마감한다는 뜻으로 수록한 듯하다.

■표만 실재로 《훈민정음》안에 있는 제목들이다.


11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내용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과 <훈민정음해례> 두 부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훈민정음》 책 겉표지에 ‘訓民正音’ 이라는 책 제목이 있다. 그리고 1면에 훈민정음이라는 내제가 실려 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글. 곧 <어지>로 널리 알려진 <어제 서문>과 <예의>라는 제목은 없다. 다만 기록된 그 글의 내용을 분석하면 글 쓴 사람이 세종이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제목을 붙여 구성을 설명하고 이해를 돕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정인지서> 라는 제복도 없다 《훈민정음》의 끝 부분에 정인지가 직접 지었다는 문명한 기록으로 보아 정인지의 서문임을 알 수 있다


가) 내제 《훈민정음》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첫 번째 내제 곧. 소제목은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의 뜻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단어의 의미가 있다.
둘째. 세종이 창제한 우리 겨레가 사용할 문자 체계 곧 한글을 이르는 말이다.
셋째. 《훈민정음》 <해례본>의 책 이름이다.
넷째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문자에 관련된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28 자 ‧모로 이뤄진 문자 체계를 비롯하여 문자의 생성과정. 제자원리. 그 기능과 운용. 문자 창제 동기와 목적 문자의 내면에 담긴 배경 사상. 그리고  성음법. 서사법. 사성법. 등 실제의 한글 문자에 대한 모든 기록 내용을 이르는 말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내제 「훈민정음』에는 <어제서문>과 <예의>란 소재목이 없다. 이 부분을 판세제의 기록이 ‘정음‘ 이기 때문에 편의상 다른 말로 ’정음편‘이라고 부를 뿐이다. 내제 《훈민정음》과 <정음편>은 한 가지 내용을 다르게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1) 정음편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음편>이라는 제목은 없다. <정음편>이라는 말은 편의상 부르는 명칭이지. 해례본 체제 속의 소제목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책 편집 방법을 살펴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그 편집 방법은 이렇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정해진 규격의 종이를 펼쳐서 인쇄한 뒤에 반으로 접는 접이식 편집을 하였다. 그 접혀진 부분에 그 책의 소재목과 같은 글자 몇 자를 찍어 인쇄하였는데. 그 가운데 인쇄된 부분을 ‘판심’이라고 부르고. 그 인쇄된 글자를 ‘판심제’라고 부른다.
판심(양면이 접혀진 부분)은 책 새로의 끝자락에 있는데 반절이 접혀 있어서 접힌 부분을 펼쳐야만 완전한 글자를 읽을 수 있다.
대개의 경우 책장을 넘기는 끝부분에 있기 때문에 책 끝이 달아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심한 경우에는 판심제 글자의 자흔만 남아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내제 《훈민정음》 안에서는 서론에 해당하는 세종의 의지를 적은 글 <어제서문>과 기본적인 문자로서의 원리를 대략적으로 정리한 <예의>가 실려 있다. 여기에는 ‘정음’이라는 판심제가 찍혀있어. 편의상 ‘정음편“ 이라고 부르고 있다. 내제 『훈민정음』. 곧 <정음편>에는 세종이 직접 짓고 적은  <어재>로 많이 알려진 <어제 서문>과 <예의>가 수록되어 있다.

(가) <세종어제서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이제서문>이라는 소제목이 없지만. 세종이 직접 지은 머리글이 《훈민정음》 맨 앞에 수록 되어 있기 때문에 ‘어제서문’이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어지‘라고 일컫는  <어제서문>에는 비록 짧은 글이지만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이중이 담겨 있고. 그가 모든 백성을 위해 실현하고자 했던 문자생활의 혁명적 개혁의 큰 뜻이 담겨 있다. 그리고 간단명료하게 취지와. 동기와 목적과. 의의를 기술하고 있다. <어제서문>을 분석하면 세종의 큰 뜻인 사대정신 곧. 자주정신. 애민정신. 창조정신. 실용정신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어지를 통하여 조선 4대왕 세종은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현군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나) <예의>
<예의>는 예의 뜻이 합한 말이다. <예의>에는 초성. 중성의 28자모의 음가와 성음과 서사에 관한 제 규정을 구체적인 글자의 예를 들어 간단하게 약술해 놓았다. <예의> 부분은 《훈민정음》 저술의 중심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리의 설명이 미흡하고. 이론적으로 자세하지 않으며. 운용면에서 예를 든 글자의 수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총체적으로 알리기 위해 간략하게 언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재로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제 <훈민정음>에는 <예의>라는 소제목이 없다. <예의>의 제목은 정인지 서문의 기록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의>에 대한 기록은 <세종신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두 곳에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먼저 <조선왕조실록> <세종신록>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癸亥冬. 我殿下創製正音 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1443년 계해년 겨울 12월에 이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은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위의 <세종신록>에 나오는 글과 똑같은 내용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계해동. 아전하창제정음28자.약게예의이시지. 명왈 훈민정음
<癸亥冬. 我殿下創製正音 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내제 ‘훈민정음’의 <예의>에서는 이십팔 자모의 음가를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에 따라 한자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의>에서 초성(자음)은 오음. 곧 아음어금닛소리. (ㄱ. ㄲ. ㅋ. ㆁ). 설음(혓소리. ㄷ. ㄸ.  ㅌ. ㄴ). 순음(입술소리. ㅂ. ㅃ. ㅍ. ㅁ). 치음(잇소리. ㅈ. ㅉ. ㅊ. ㅅ. ㅆ). 후음(목구멍소리. ㅇ. ㅎ. ㆅ. ㆆ). 반설음(반혓소리. ㄹ). 반치음. (반잇소리. △).의 체계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오음의 각자병서를 그 안에 포함시켜 적고 있다.

이어서 논란이 많았던 받침 규칙. 곧 ‘모든 자음은 받침이 될 수 있다’는 ‘종성부용초성의 종성법이 기록되어 있다 순음에 ㅇ을 아래로 이어 쓴 순경음.  ㅸ. ㅱ. ㆄ) 규칙인 연서법. 모든 자음을 옆으로 나란히 쓰는 (합용병서법 ㄶ. ㅵ. ㅫ), 초성 아래에 쓰는 모음과 초성 오른쪽에 쓰는 모음을 나누어 설명한 부서법. 초성과 중성과 종성이 합하여 음을 이루는 사성점에 관하여 간략하게 적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기록된 특이한 자형이 적혀 있다. 그것은 치음인 ㅅ. ㅆ.  ㅈ. ㅉ
.의 한 획을 오른쪽으로 길게 변형시킨 정치음 사 솨 ㅉ. ㅈ. ㅉ의 한 획을 오른쪽으로 길게 변형시킨 정치음 사. 솨. 숭. 쥬 치 와 왼쪽으로 길게 변형시킨 치두음 세. 수. 쓰. 쯔. 초 이다. 이 자모는 중국의 한자음에 존재하는 두 가지  계열의 치음 곧. 정치음과 치두음을 구분하기 위하여 억지로 만들어 언해본에 첨부한 것이다.

중국의 한자음 표기가 주목적이어서 15~16세기의 문헌 곧. <사성통고 서문>(1447). 《훈민정음》 <인해본>‘(1459). <사성통해>(1517년). <노걸대 언해>와 <박통사 언해>(16세기초) 등의 한자음을 기록한 문헌에만 쓰였다. 우리말에는 치두음과 정치음이 없기 때문에 곧 사장되고 말았다.

나) 내제 <훈민정음해례>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두 번째 소제목은 <훈민정음해례>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맨 앞부분 세종이 쓴 소제목 <훈민정음>에 이어서 소제목 <훈민정음해례>편이 있다. <훈민정례>는 《훈민정음》 저서의 중심 부분이다. 집현전 학사들. 흔히 ‘언문팔유’라고 부르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의 여덟 학사들이 세종의 《훈민정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내용을 자세히 풀이하고. 예를 들어 쓴 글이다. 내제 『훈민정음해례』에는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합자해>. 그리고  <용자례>가 차례로 실려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제목 <훈민정음해례>에는 특이한 부분이 있다. 오해. 곧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 는 <마무리> 노래라고 하는 칠언 고시가 있다. 모두 143 구가 수록 되어 있다. 그 내용은 앞의 본문을 풀이하고. 요약하여 진술하거나 앞의 본문의 중요한 부분을 다시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오해의 본문은 신문의 해설이고.  <해설 기가>. 곧 <풀이의 노래> 또는 간추린 노래 부분은 운문 형식을 취한 다른 해설이라 말할 수 있다.

1) <정음해례편>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정음해례편’이라는 제목은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제 『훈민정음해례』에는 <제자해>. <초성해>.<중성해>. <종성해>. <합자해>의 <오해와 <용자례>가 수록되어 있다. <해례>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오해와 일례를 합하여 이르는 약칭인 것이다. 이어서 마지막 글인 <정인지서>가 수록 되어 있다. 내제 『훈민정음해례』의 판심에 <정음해례>라는 판심제가 찍혀있어. 편의상 앞의 <정음편>에 이어서 <정음해례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제 『훈민정음해례』와 <정음해례편>은 한 가지 내용을 다르게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가) <제자해)
제자해는 《훈민정음》의 배경 사상과. 제자의 원리와. 성음이 이뤄지는 이치와. 초성 중성의 소리 성격과 오행과의 관계. 그리고 천지 운행의 질서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의 철학적 ‧ 사상적 배경은 성리학과 역학의 음양오행설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훈민정음》에서 초성 오음(아 ‧ 설 ‧ 순 ‧ 치 ‧후)의 기본자 ㄱ. ㄴ. ㅁ. ㅅ. ㅇ 다섯 자의 제자 원리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곧 상형의 방법으로 만들었고. 그 오음의 기본자에 가획하여 17 초성을 만들었다는 것과 초성의 오음체계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오음의 소리 성질과 오행과의 관계를 사계절과. 네 방위와 연관시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넷째. 말소리의 맑고 흐림을 분류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중성의 경우는 모두 열한 자인데.  ‧ 는 천.  ㅡ 는 지. ㅣ는 인. 삼재를 본뜬 것임을 설명하고. 중성의 음성적 특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여섯째. 중성은 기본자 ㅡ와 ㅣ에  ‧ 를 가점하여 여덟 자를 만들었다는 점과. 중성 각각의 성질을 설명하고 있다.

일곱째. 음성의 음양은 하늘의 이치요. 초성의 오름은 땅의 이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덟째. 음성적 특성과 문자의 특성을 설명하고. 초성과 중성이 합하여 음절을 이루는 성음법을 설명하고 있다.

아홉째. 초성 ‧ 중성 ‧ 종성이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서 음성을 이르는 성음법과 음절 구성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열째. 종성은 초성을 다시 쓴다는 것은 네 계절의 순환과 같이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어 받침의 원리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열한째. 풀이의 노래. 곧 한시. 곧 한시 해설 칠언 배율 86구가 실려 있다.

(나) <초성해>
첫째. 초성은 운서(한시의 운자를 모은 음운 자전)에서 한 음절의 첫소리라는 것과 말소리가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둘째. 초성의 성격은 운서의 자모라는 점과. 초성이 중성과 종성을 만사 소리 곧, 음절이 이뤄지는 과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초성 23자음을 오음. 곧 아음(어금닛소리. ㄱ ㅋ ㄲ ㅇ). 설음(헛소리. ㄷ ㅌ ㄸ ㄴ). 순음(입술소리. ㅂ ㅍ ㅃ ㅁ). 치음(ㅈ ㅊ ㅉ ㅅ ㅆ). 후음(목구멍소리 ㆆ ㅎ ㅇ). 반설음(반혓소리. ㄹ). 반치음(반닛로리 ㅿ)의 체계로 분류하고. 한자음을 예를 들어 실제 발음을 설명하고 있다.
넷째. 풀이 노래. 곧 한시 해설 참언 율시 8구가 실려 있다.

(다) <중성해>
중성해에서는 중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국운서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풀이 방식을 보여 주고 있다.

첫째. 중심(가운데소리. 모음)이 모든 글자 소리(자운)의 가운데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둘째. 중성의 기본자  ‧ . ㅡ .  l 가 초성(첫소리. 자음)과 종성의 사이에서 서로 합하여 음절이 됨을 한자어의 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를 ㅡ에 가점하면 ㅗ .ㅜ. ㅛ. ㅠ가 되며 ‧를  ㅣ의 좌우에 가점하면 ㅏ . ㅓ . ㅑ .ㅕ가 됨을 설명하고 있다

셋째. ‧ 는 ᄐᆞᆫ자처럼 초성 ㅌ 아래 붙여 쓰며. 초성 ㅌ 아래와 종성 ㄴ 사이에서 소리를 이루고. ㅡ 는 즉자처럼 초성 ㅈ 아래 붙여 쓰며 초성  ㅈ 아래와 종성   ㄱ 사이에서 소리를 이루고. ㅣ 는 침자처럼 ㅊ 오른쪽에 붙여 초성 ㅊ과 종성  ㅁ 사이에서 소리를 이룬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넷째. 중성의 합용병서(이중모음)의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예로 ㅗ ‧ ㅏ가 합치면    ㅘ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ㅣ 모음의 성격과 소리의 어울림을 설명하고 있다.
일곱째. 풀이노래. 곧 한시 해설 칠언 율시 8구가 실려 있다.

(라) <종성해>
첫째. 종성해에서 종성은 초성과 중성을 이어받아 음절을 이루는 이치를 한자어 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둘째. 종성이 성조(소리의 높낮이). 곧 사성점의 규정과 분유. 그리고 그 이치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셋째. <정음편> <예의>와 전술한 <제자해>에서는 모든 자음은 받침으로 쓸 수 있다(終聲復用初聲)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종성해에서는 ‘ 然ㄱ. ㆁ. ㄴ. ㅂ. ㅁ. ㅅ. ㄹ 八者可足用也 (종성. 곧 받침은 초성 ㄱ .ㆁ. ㄷ. ㄴ. ㅂ. ㅁ. ㅅ . ㄹ 여덟 자로 충분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지 않아 그토록 논란이 많았던 받침에 대한 규칙이 이 구절로 말미암아 확실히 정리되었다.

넷째. 불청불탁음. 전청 ‧ 차청 ‧ 전탁음의 소리 성격과 성조에 사용되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종성의 사성법과 그 규정. 받침의 소리 위치를 한자어와 순우리말(토박이말)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섯째. 오음에서 빠르고 느림이 서로 호응하는 자모를 설명하고 있다.

일곱째. ㄹ은 순 우리말에만 쓰인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별. 월. 질과 같은 ㄹ 받침 한자어는 중국운서에서는 볃.  닫. 짇‘으로 입성인데 조선의 한자음은 ㄹ로 약하고 속되게 변했다. 따라서 입성이 되지 못한다. ’별‘에서 ㄹ 받침을 ’ᄚ으로써 이영보래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영모로써 래모를 보충한다’는 뜻으로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의 하나이다.
이 규정은 신숙주가 쓴 <동국정운> 서문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又於質物諸韻 以影補來 因俗歸正)
질과 물과 같은 모든 ㄹ 받침의 한자어 운은 (영모. ㅎ)로서 (레모. ㄹ)를 도와서 속됨으로부터 바름으로 돌아간다.
여덟째. 풀이 노래. 곧 한시 해설 칠언 배율 20구가 실려 있다.

(마) 합자해
오해 중에서 합자해가 제자해 다음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제자해. 초성해. 중성해. 종성해를 잘 설명하여. 이해를 잘 시켰다 하더라도 우리말의 음성과 훈민정음의 음절의 문자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면 문자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째. 초성 ‧ 중성 ‧ 종성이 합하여 글자가 되는 방법과. 서사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둘째. 중성의 기본자  ‧. ㅡ. ㅣ의 운용을 설명하면서. ‧. ㅡ. ㅗ. ㅛ. ㅜ. ㅠ.는 초성 아래에 쓰고  ㅣ. ㅏ. ㅓ. ㅑ. ㅓ는 초성자의 오른쪽에 쓴다. 종성자는 초성과 중성 아래에 쓴다.

셋째. 초성의 합용병서(ㅵ)와 각자병서 ㆆㆆ. ㆀ의 서사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종성도 동일함을 설명하고 있다.

넷째. 중성의 합용병서 글자와 합용 방법과 한자와 훈민정음의 썩어 쓰일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다섯째. 성조. 곧 사성법의 성격과 방점 찍는 방법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여섯째. 연서의 방법과 시골말의 예를 설명하고 있다.
일곱째. 성조와 사성법을 설명하고 있다.
여덟째. 반설음과 순경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홉째. 풀이 노래. 곧 한시 해설 칠언 배율 20구가 실려 있다.

(바) 용자례
용자례에서는 이론적인 설명이 없다.
첫째.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 사용의 예를 순 우리말 94 개의 낱말을 예로 들고 있다.

둘째. 초성은 오음체계. 곧 아음 ㄱ ㅋ ㆁ. 설음 ㄷ ㅌ  ㄴ. 순음 ㅂ ㅍ ㅁ ㅸ. 치음 ㅈ ㅊ ㅅ. 후음 ㅎ ㅇ. 반설음 ㄹ. 반치음 ㅿ의 순서대로 순우리말의 음을 예로 들었다.

셋째. 기본자 ㆆ은 순우리말이 없어 단어의 예를 싣지 않았다.

넷째. 초성에서는 오음의 순서대로 기본자 16과 순경음 ㅸ 포함 17자의 순서대로 34자의 순우리말의 음을 예로 들었다.

다섯째. 종성은 기본자 ‧.  ㅡ. ㅣ 와 초출자 ㅗ. ㅏ. ㅜ .ㅓ와 재출자  ㅛ. ㅏ. ㅠ. ㅕ 의 순서대로 순우리말의 음을 예로 들었다.

여섯째. 종성에서는 11자의 순서대로 종성 하나에 순우리말 네 개씩 44개의 낱말을 예로 들었다.

일곱째. 종성에서는  ㄱ. ㆁ. ㄷ. ㄴ. ㅂ. ㅁ. ㅅ. ㄹ의 순서대로 고유어 두 개씩 16개의 낱말을 예로 들었다.

여덟째. <용자례>에는 한자 해설인 풀이 노래. 간추린 노래가 없다.

(1) 정인지서
《훈민정음》 <해례본>에 정인지의 서문은 없다. <훈민정음해례>의 용자례가 끝나면 줄만 바꾸어 <정인지 서문>이 실려 있다.
정인지는 《훈민정음》의 창제 후. 반포하는 과정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는 《훈민정음》 연구의 중심 기관인 집현전의 책임자 곧. 대제학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후 반포의 과정에서 학문적으로 지근에서 세종을 도왔다.
<용비어천가>(1445년. 세종 27년 편찬. 세종29년 간행)를 권제 안지와 함께 지었으며. 세종의 서문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해설하고 보충했다.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자와. 해례본 편찬 경위와. 창제와 반포의 참여자를 밝힘으로써 《훈민정음》이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정인지 서문>이라는 소제목은 없다.
<세종신록>의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조의 기록을 보면 ‘예조판서 정인지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그의 직책과 이름과. 이 글을 쓰는 자세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精通十1年 9月 上澣. 資憲大夫. 禮曹判書. 集賢殿. 大提學.
知春秋館事. 世子右賓客鄭麟趾拜手 稽首謹書‘
<명나라 연호인 정통 11년 (1446년. 세종28년) 9월 상순에 자헌대부 예조판서 집현전 대제학 지춘우관사 세자우진객인 정인지는 두 손 모아 머리 숙여 삼가 쓰옵니다.>

위의 두 기록으로 보아 <정인지 서문>이라는 소제목이 없지만 일반적으로 ‘정인지서’ 또는 ‘정인지 서문’ 이라고 부르고 있다.

<정인지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 동기와. 자연과의 호응과 문자에 담긴 재차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둘째. 우리말과 중국 한자와의 부조화와 한자 사용이 불편성. 그로 인한 소통이 어려움을 서술하였다.

셋째. 고대 문자관. 곧 이두의 사용을 비판하며 《훈민정음》의 표현상의 우수성을 서술하였다.

넷째. 《훈민정음》의 완벽한 음성학적 어울림. 성음의 과학적인 조화. 그리고 음악성이 뛰어나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함을 서술하였다.

다섯째. 《훈민정음》의 실제 생활에서의 원활한 활용과 학습의 편리성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여섯째. 창제를 도운 다른 신하들. 곧 해례의 집필자 여덟 사람의 직책과 성명. 집필의도를 서술하였다.

일곱째. 《훈민정음》이 창제자가 세종이라는 사실과. 《훈민정음》 창제는 성군으로서 위대한 업적임을 찬양하고 있다.

끝으로 《훈민정음》창제 년도와 정이지의 직책과 본인의 서명을 밝혔다.

12. 《훈민정음》 <해례본> 편집의 특징
《훈민정음》 <해례본>의 구조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국왕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기 위한 편집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편집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첫째. 《훈민정음》에는 서문의 자리에 서문이 없고. 발문의 자리에 서문에 해당하는 <정인지서>가 있는 것이다. 서문은 그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그 글 전체에 대한 취지와 동기. 의의. 그리고 본문에서 다룰 수 없는 내용들을 간략하게 약술하여 적는 글이다. 전제의 글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글이기 때문에 마땅히 맨 앞에 와야 한다. 하지만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본문에 해당하는 임금의 글인 『훈민정음』이 앞에 오고 신하의 글인 정인지의 서문은 뒤에 편집하였다. 그 이유는 《훈민정음》이 창제자가 세종 임금이기 때문에 신하의 글이 임금의 글 앞에 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임금이 쓴 글의 서체는 정자체로 썼고. 신하들이 쓴 글은 약한 행서 기운을 넣어 썼다. 이것은 왕의 글씨에 제왕의 권위를 부여하여 신하들이 글씨보다. 근엄하고 반듯한 느낌이 더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였다.

셋째.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내제 <훈민정음>과 내제 <훈민정음해례>의 활자 크기가 다르다. 왜냐하면 <훈민정음>편의 <어지>와 <예의>는 임금이 쓴 글이고. <훈민정음해례>편의 해례는 신하들의 글이기 때문에. 임금이 지은 글의 위엄함을 부여하기 위하여 활자를 신하 글보다 크게 하였던 것이다.


넷째. 임금이 쓴 글 <훈민정음>편의 항수와 줄의 글자 수는 7항 11자이고. 신하들이 쓴 글 <훈민정음해례>편의 항수와  줄의 글자 수는 8항 13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음편>의 글자의 크기가 <훈민정음해례>편의 글자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다섯째. <합자해>의 풀이 노래. 곧 칠언고시의 해설 시가에는 임금이 주체가 되면 본문의 내용은 물론 칠언의 시가라 할지라도 줄을 바꿔서 군왕 숭배 정신을 표현하였다.

여섯째. <정인지서>는 신하의 직접 지은 글이기 때문에 용자례와 활자 크기는 같되 한 칸 내려 씀으로써 신하의 겸양의 뜻을 표현하려 하였다.

일곱째. ‘전하’라는 말이 나오면 이래 칸 수에 관계없이 빈칸으로 남기고 맨 앞으로 올렸다. 그 뜻은 임금 앞에 어느 누구도 올 수 없다는 군신간의 위계질서의 확고함을 표현한 것이다.

여덟째. ‘세자라는 말이 나오면 앞의 한 칸을 띄고 적었다. 비록 왕은 아니더라도 왕족을 높이려는 의도로 구별하여 편집했다.

이러한 편집 방법은 성경 불경. 유교 경전 등에서 많이 쓰고 있으며. 종교적으로 절대자인 신을 높이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 당시  세종조는 군왕의 절대적인 권위가 인정되던 때여서 그렇게 구별되게 편집하였던 것이다.

13.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
《훈민정음》이 훌륭한 문자로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말  또한  《훈민정음》으로  기록하기에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음성을 기록할 문자가 없는 상태에서 그 말의 문법적. 음운학적. 음성학자적인 연구를 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갖은 고난을 딛고 우리말에 꼭 맞는 새 글자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것은 사상을 초월하는 민족적으로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창조하기 위해 뛰어난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사회적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백성들이 문자 없는 불편한 삶을 위해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겠다는 세종의 강한 의지가 있었다.

둘째. 세종 자신이 <홍무정운>을 비롯한 여러 운학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셋째. 현군 세종을 돕고 함께 연구할 수 있는 유능하고 젊은 집현전 학사들이 많이 있었다.

넷째.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궁중에 세자와. 대군과. 공주가 지근에서 부왕을 도왔기 때문에 학문적. 이론적. 체계적. 심충적인 연구를 중단 없이 할 수 있었다.

다섯째. 세종은 건강 상태가 좋은 군주가 아니었지만 통치기간이 긴 32년 동안이어서 문자창제를 위한 지속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다.

여섯째. 세종 조는 국력이 최강인 시기여서 여러 여건이 서로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 문자 창제 작업 또한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었다.

《훈민정음》은 세종이 직접 궁구하여 만든 문자이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새 문자 창제를 알리고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동기. 제자원리. 성음법. 서사법. 사성법 등에 대하여 필요 적적한 해석과 설명의 글을 짓게 하였다. 대제학 정인지를 비롯하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 집현전 8학사들이 세종의 명으로 지은 글을 우리들은 《훈민정음》 <해례>라 부른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한문으로 기록된 해례본은 일반 서민을 위한 책이 아니었다.
한문에 대하여 잘 알고. 운학에 대하여 잘 아는 기득권층과 사대부들과 식자층을 위한 책이었다. 다시 말해 국가 지도자급의 지위에 있는 자들에게 먼저 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을 비롯한 반포에 참여했던 집현전 학사들은 중국의 운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주변국들의 문자와 언어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보면 그들이 음운학의 전문가들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고,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과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말의 음운현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말을 이루는 음성과. 음운과. 음소를 나누어 연구할 수 있었고. 그에 빠른 음운학적 특징과 공통적 성질을 찾게 되었다. 또한 우리말의 문법적 체계를 연구하면서 단어와 어절과. 문장을 이루는 총체적인 특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세상에는 배우기 쉬운 말도 없고. 글짓기 쉬운 글자도 없다. 문자의 경우 읽기 쉽고. 쓰기 편한 글자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읽기와 쓰기에 쉬운 문자이지. 말하는 것처럼 문법에 맞게 글자로 문장을 짓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문자 체계였다.

우리말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말이다. 새로운 문자의 창제가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 말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비교적 쉽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치하는 글자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왕인 세종의 뚜렷한 목적의식과 탁월한 학문적 자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은 말만이라도 있었기에 문자 창제가 덜 어려웠던 것이다. 만약에 문자도 창제해야 하고. 말도 창제해야 했다면 《훈민정음》 창제는 불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누가 이 세상에서 말과 글씨를 한꺼번에 만들 수 있겠는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만들었다 해도 그렇게 의도적인 시각으로 만든 말과 글이 오래 갈 수 있겠는가? 곧 사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언어와 문자의 역학적인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우리 글자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겨레의 모든 인간사를 모순 없이 조화롭게 기록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창조적인 쾌거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은 가장 단순하고. 과학적이며.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문자로 창제되었다. 이러한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 은밀하게 진행한 극비의 대규모 프로젝트. 곧 국책사업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의사를 소통하고. 각자의 갈등을 해소하고. 내면의 생각을 표현하고. 자기의 의견을 전달하고. 모든 정보와 소식을 알리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문자의 창제였기 때문에 그 창제과정은 그만큼 어렵고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곧 한글의 창제는 최고의 찬사를 받아야 마땅하며. 길이길이 그 값어치를 높여야만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세종의 생각을 가장 분명한 전거 《훈민정음》 <해례>를 통하여 짐작해 보면. 새로 만든 문자 《훈민정음》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훈민정음》이 우리말을 쉽고 쓰고 편하게 적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충분한 글자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 문자로써 활용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으며. 전혀 흠이 없고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천하의 어떤 문자보다 독창적이어야 하고. 아름답고 멋이 있는 문자가 되고 최고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다. 특별히 백성들이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고. 모든 방면에 걸쳐 불편함이 없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으며. 억지가 없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연 《훈민정음》. 곧 한글은 위의 기록처럼 완벽한 문자였는가?
그 해답은 대단히 간단하다. 2020년 현재. 우리가 574년 동안 완벽하게 일상의 문자로. 예술적인 서예의 글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뚜렷한 증거요. 정확한 해답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구촌에서 살고 있다. 언어의 장벽이 예전처럼 높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 누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과 으뜸으로 빼어난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는 겨레의 자긍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 어떤 소리도 글자로 적을 수 있는 완벽한 글자가 새삼 어디에 있겠는가?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훈민정음》. 곧 한글뿐이다.
《훈민정음》 <해례>의 기록대로. 세상의 어떤 문자보다도 가장 많은 문자 표현이 가능한 최고의 문자가 《훈민정음》. 곧 한글이다.
말소리도 어떤 말보다 아름답고. 멋진 표현이 가능한 말이 우리말이요. 우리 글자 한글인 것이다.

세상 어떤 글자가 사상적으로 과학적으로. 음운학적으로 원리와 원칙을 가지고 창제한 문자가 있었던가? 《훈민정음》만이 온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이며. 《훈민정음》 <해례본>만이 유일한 문자 해설서인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근거로 하여 가장 자주적이며. 실용적이며.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문자 《훈민정음》은 온 나라에 널리 쓰이는 나라글자가 되었다.
이렇게 훌륭한 말과 글자를 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겨레의 빛나는 앞날을 위해서도. 이 나라가 뚜렷하게 박차고 앞길로 나서기 위해서도 《훈민정음》. 곧 한글을 바르게 쓰고. 뚜렷하게 말하며. 아름답게 가꿔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길만이 이 겨레가 끝없이 뻗어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지극히 마땅한 일일 것이다.

14. 《훈민정음》 의 판본
가) 한문본
1)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훈민정음》 원본으로 알려진 <해례본>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목판본 책으로. 1책 2권 33장 66면으로 엮어져 있었다. 발견될 당시 책 표지와 맨 앞부분 네 쪽이 고의적으로 찢겨져 없어진 상태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은 세종 28년(1446년) 반포 된 이후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 있다고 해도 반포 후에 종간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모아 세종 28년(1446년) 반포할 때 간행한 초간본 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훈민정음》의 해례는 이 책 저술의 중심 부분이었다. 창제자. 창제목적. 임금의 창제 정신. 창제 과정. 제자원리. 성음법. 초 ‧ 중 ‧ 종성의 음가. 글자의 운용. 철학적 배경. 운학적 배경 등 설명해야 할 모든 것을 다 기록해 놓았다. 474년 동안 모든 이론적인 내용을 모른 채 추측만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우리 민족 말살정책이 극에 달한 시기에 《훈민정음》해례본은 일제를 비웃기라도 하듯 기적같이 발견되었다. 외솔이 ‘하늘이 한글의 운을 돌보시고 복 주신 것’ 이라고 외쳤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추하동의 이한걸가에 소장되어 왔다. 그의 선조 이천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은 하사품이었다.
간송 전형필씨가 어렵게 입수하여 오늘날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소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이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씨의 손에 들어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기까지는 김태준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김태준은 제자 이용준에게서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재를 알았고. 간송 전형필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있었던 그는 일천 원을 요구하는 이용준에게서 일만 천원(11.000원)을 지불하고 입수하였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기적같이 입수한 산송 전형필은 6 ‧ 25 한국전쟁 중에도 《훈민정음》 해례본 한 권만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고 피난길을 떠났다. 그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안전하고 완전한 보관을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으며. 심지어 잠잘 때에도 베게삼아 베고 잤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은 간송 전형필씨가 소장하고 있다 하여 <전씨본> 또는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부르고. 안동에서 발견 되었다 하여 <안동본>이라고도 부른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76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2) 《훈민정음》 하례본 <상주본>
간송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지 68년 만에 상주본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 되었다. 2008년 8월 상주지역 고서적 수집가인 배익기(45)가 훈민정음의 소장을 세상에 알렸다. 상주에서 발견된 이 해례본의 학술적 연구와 15세기의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기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경상북도 상주에서 발견되었기에 통칭 ‘상주본’ 이라 부르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과 그 가치를 비교할 때. 1조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소유자인 골동품 가게 주인 조용훈이 나타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배익기가 훔쳐간 것이라고 고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용훈의  주장은 배익기가 30만원 상당의 고서화를 사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몰래 끼워서 가져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주인을 가리는 법정 싸움은 10년 동안 계속되었다. 2011년 1심에서 ‘상주본’을 주인 조용훈에게 돌려주라는 판결을 하였고. 배익기는 억울하다고 호소하면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았다. 이후 2012년 9월 2심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배익기가 무죄임을 선고하였다. 그 후 2012년 성주본 원 주인 조용훈은 사망하였고. 배익기는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배익기의 말대로 《훈민정음》 해래본 <상주본>은 문화재청으로 귀속되겠지만 배익기는 섭섭한 마음에 성주본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 결과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2017년 세상에 잠깐 공개되었는데 책의 일부가 불에 탄 상태였다 그 까닭은 배익기의 집에 불이 나면서 ‘상주본’의 일부도 불에 탔기 때문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는 문화재청의 반환 강제 집행을 막아달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 3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최근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56)가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청구 이의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019년 7월15일 밝혔다.

1,000억 원을 준다 해도 팔지 않겠다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의 욕심이 과한 것인가? 아니면 소장자의 권리도 여느 정도 보장해 줘야하는 것 아닌가? 이 두 문제의 해답을 찾기란 정말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대한민국 문화제의 소유권은 대한민국에 있으며. 그 문화제의 소유자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마음을 크게 먹고 대의를 위해 문화재청에 흔쾌히 기증하고. 문화재청 또한 소장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여 섭섭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제2, 제3의 문화재 소유반환을 위한 소송 사건이 멈춰질 테니까.

세계 최고의 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하루라도 빨리 위험한 보관 장소에서 가장 안전한 박물관으로 옮겨 소장될 수 있도록 관계기관은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3) <조선왕조신록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28년조, 곧 정통 11년(1446년)9월 29일의 기록을 보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간행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직접 지은 어제 서문. 곧 <어지>와  <예의>. <정인지서문>이 함께 기록 되어 있다. 이것은 《훈민정음》 창제의 반포를 거의 동시에 하려는 세종의 뜻에 따라 신록에 기록된 대로 <어지> <예의> <정인지서> 만으로 창제와 반포를 마무리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와 그 사용을 반대하는 상소가 잇따르고. 당시 기득권 세력의 극렬한 저항과 사대부들의 반발이 극심하였다

이에 세종은 《훈민정음》이 우리말에 합치함은 물론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하며. 짧은 시간에 익힐 수 있고. 표현이 무궁무진한 우수한 문자임을 설명하기 위한 해설서가 필요하였다. 세종은 곧바로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제자 원리. 사상적 배경. 음가와 성음법. 글자의 운용 등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해례>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이 실제의 생활 속에서. 우리말을 기록할 수 있는 문자로서의 사용하는데 전혀 불편함이나 문제점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할 저술을 편찬케 하였다. 정인지. 권제. 안지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저술이며 악장체 문학의 대표적인 명작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 결과 《훈민정음》이 완벽한 문자임을 증명되었고 세종 28년(1446년) 9월 상한에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조촐하게 반포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28년 조에는 《훈민정음》의 <어지>와 <예의>와 <정이지서>만 있다. <해례>에 대한 기록은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문 판본인 《훈민정음》 <실록본>에는 해례가 빠져 있는 것이다.

4) 배자예부운략본
<배자예부운약본>은 숙종 4년에 간행된 운서에 실려 있는 금속활자본이다. <어제 서문>과 <예의>만 실려 있다. 세종대왕 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다.

5) 열성어제본
조선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 수록한 관찬 시문집인 열성어제본에 실린 판본이다. 현재 박종국님이 소장하고 있다.

6) 경세훈민정음도설본
연세대학교 인문과학연구서에서 영인한 판본이다.

나) 언해본(한글본)
1) 월인석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1447년 세조가 세종의 명에 따라 그의 모친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적은 <석보상절>을 편찬하였다. 세종은 그 글을 읽고 각각 2구절에 따른 부처님의 공덕을 찬송하는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가 <월인천강지곡>이다.
1457년(세조 3년) 세조는 왕세자 도원군이 죽자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부왕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개고해 합편한 <월인석보>를 편찬하였고 1459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이 간행될 때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을 함께 수록되었다.
초간본은 약 30권 정도 간행되었고 현전하는 <월인석보> 판본은 초간본과 중간본 다 합하여 12권인데 계속 발견되고 있다.

1956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국고총간>으로 세 종류의 판본이 영인본으로 간행되었다. 그리고 <국어학회>가 고전을 선정하고 편집하여 국어학 강독 교재용으로 엮은 책인 <고전선총>(1960년 3월 30일 국어학회 편저 1권 초판본 298쪽. 통문관 출판)을 펴낼 때 언해본 <훈민정음>.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이 실려 있다.

2) 서강대학교 소장본 (세종어제훈민정음)
1459년(세조 5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본과 같은 판본이다. 언해본 가운데 가장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강대학교에 소장되어 있고. 하단이 손상되어 및 글자는 알아보기 힘들다.

3) 고려대학교 육당문고 소장본(세종어제훈민정음)
육당 최남선 선생은 자신이 소장하던 모든 서책을 고려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때 기증 받은 단행본 《훈민정음》 언해본을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육당문고>를 설치하여 다른 서책들과 함께 소장하고 있다. 여러 부분을 보시하였다.

4) (박승빈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일명 (박씨본). 또는 <박분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 말기의 한글 연구가였던 박승빈 선생이 소장했던 단행본의 판각본이다. 고려대학교 육단문고 소장본과 같은 판본이다.

5) 희방사판 소장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월인석보> 중간본이 간행될 때. 제 2권에 <세종어제훈민정음>이 수록되었다. 희방사판 소장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이 수록되었다. 희방사판 소장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은 1586년 선조 6년이라는 간기가 있어 초간본 <월인석보>에 가장 가까운 판형으로 보고 있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의 하나로. 중국의 치두음과 정치음을 더하여 언해한 뒤. 맨 뒤에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영보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아 <동국정운>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희방사에 소장되었으나 6 ‧ 25 전쟁 때 전각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2020년에 원본과 똑같은 목판본을 복각하여 다시 책을 엮어 복원하였다.

6) 일본 궁내성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일제강점기에 일본 궁내성에서 구입하여. 현재 서울대학교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다.

7) 일본 가네자와씨본 《세종어제훈민정음》
일본인 가네자와씨가 한국에서 구입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판본이다.

8) 한글사본 《세종어제훈민정음》
<한극학회>가 운영하는 <한글사>에서 한글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발행한 잡지에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임>이 실렸다. <어지>. <예의>.  <정인지서> 만 실려 있고 <해례>는 없다.

9) 대동출판사 소장본 《세종어제훈민정음》
대동 출판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판본이다.

10) 양주동 소장본
무애 양주동 선생이 소장하던 판본이다.

11) 강원도 수타사판 소장본
강원도 홍천군 동면 공작산 수타사에서
찍어 엮은 판본이다.

12)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1956년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국고총간>을 발간할 때 합본하여 영인본으로 간행한 판본이다.

13) 안동 정흥사판 소장본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경흥사에서 찍어 엮은 판본이다.

14) 논산 쌍계사판
충청남도 논산군 쌍계사에서 찍어 역은 판본이다.

15) 장흥 보림사판
최근에 발견된 판본으로 그 내용은 기존의 판본과 대동소이하다

<월인석보본> 《세종어제훈민정음》은 모두 목판본이기 때문에 목판본 책을 원본으로 하여 동일하게 목각하고 난 뒤. 목판을 종이에 찍어 책으로 엮어 만든 판본들이다. 따라서 판형이 유사한 목판본 책이 많은 것이다. 지금도 <월인석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목판본 계속 복원하여 찍어내고 있다.

15. 축하행사가 없었던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가) 잔치 없는 거국적 행사
《훈민정음》의 창제는 세종의 전대미문의 창조적인 대업적이며. 우리 겨레의 문자생활의 혁명적인 쾌거였으며. 인류의 문자가 지행해야 할 가장 보편적인 가치와 원리가 담겨있는 최고의 문자 생활의 모델을 펼친 것이었다. 그런데 세종은 왜 훈민정음을 창제를 완료하고도 왕조실록에서 조차 떳떳하게 언급할 수 없는.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하고 애매모호하게 기록하였을까? 그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공적이었다. 마땅히 온 겨레가 함께 참여하고. 기뻐해야 할 거국적인 행사였다 성황리에 잔치를 벌여야 할 우리 한민족 최고. 최대의 경사였다. 임금의 너그러운 덕을 기리고. 현군의 치적을 찬양하고. 온 나라가 축제기간을 정하여 지속적으로 국운이 흥왕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는 행사로 발전시켜 나갔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낌새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무엇인가를 쉬쉬하고 숨기려는 듯한 관료들의 미온적이고. 미묘한 행적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나) 《훈민정음》의 창제를 알렸던 여러 기록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와 관련하여 모든 축하 행하를 축소하고. 온 나라에 널리 알리지도 않았고. 실제의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의도도 없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에 관련된 모든 일의 처리에 소극적이었고. 세종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면 위의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조선 전기의 <승정원일기>에 《훈민정음》의 창제의 전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조 국왕의 최측근 부서인 승정원에서 작성한 국왕의 업무일지다. 그리고 모든 왕명과 관련된 문서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기록한 일기였다. 당시의 기록 가운데 가장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국정기록으로 그 내용이 자연스럽게 기록되었다.
<승정원일기>는 왕조실록을 기록할 때 참고할 정도로 귀중한 자료였다. 세종조의 <승정원일기>는 《훈민정음》의 창제 과정에서 세종의 역할은 물론 집현전 학사들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 되었고.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세종의 문자 정신과 사상과. 목적과. 의의와. 가치가 논리 전연하게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전란 중에 모두 소실되어 그 속에 기록된 중요한 내용을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둘째.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25년 조에 《훈민정음》의 창제를 알렸다,
 (是月上親制言文二十八子. 基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內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

<명 정통 8년. 곧 <세종 25년 (1443년)12월 30일>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 ‧ 중성 ‧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긴하지마는 전환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일렀다.>

셋째. 1446년 9월 상한에 반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서>에 《훈민정음》이 창제를 알렸다.

(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 二十八字 略揭例意以示之 名曰 訓民正音. 象 形而字倣古篆. 因聲而音 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 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 簡易要. 精而通).

(계해년 1443년. 세종25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보여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옛글자처럼 모양을 본떳지만 말소리는 음악의 일곱 가락에 들어맞는다. 전자인 삼재와 음양 이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써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 할 수 있다)

넷째. 세종 28년(1446) 9월 상한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어지> 기록이다.
(是月 訓民正音成御製曰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子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易習 便於日用耳)
<이달 임금님께서 훈민정음을 친히 창제하시고 가라사대.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중국의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측은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문자의 창제는 단순한 계획과. 막연한 기대와. 일천한 노력으로 이뤄지는 작업이 아니다.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려면 언어학. 음운학. 음성학. 문자학. 문자의 역사와 계통.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의 문자와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는 학자가 많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과정을 볼 때.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대단히 난해한 프로젝트이다. 따라서 국가 책임자의 확고한 창제 의지와. 엄청난 경제적 희생과. 원리와 이론에 대한 연구와. 오랜 시간 중단 없는 지속적인 노력과. 음운학과 문자학에 관련된 여러 주변학문이 저변에 넓게 깔려 있어야 하며. 문자의 실용성에 대한 적용과 번민. 그리고 그에 맞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될 때에 가능한 사업인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온 나라가 달려들어서 하나가 될 때 이룩할 수 있는 국책사업이었다. 요즘 말로 천문학적인 국가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국가 추진 중점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과연 세종 때의 시대적 배경이 그토록 문자와 언어의 연구에 천착할 수 있는 분위기였을까? 그렇지 못했다. 주면의 음운학. 음성학. 문자학 연구가의 부재로 세종 스스로 《훈민정음》 창제 작업을 아무도 모르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6.《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였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시대적 상황이 혼동으로 빠져들던 시기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1940년을 전후로 국내외의 정세를 살펴보면 얼마나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가를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가) 1940년 전후의 역사적 사건들
중일전쟁은 1937년에 발발하였다  전쟁에 광분한 일제는 이어서 대한민국의 모든 문화를 말살하려고 미쳐 날뛰고 있었다. 우리말과 글 곧. 한글도 피할 수 없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훈민정음》 해례본의 발견은 너무나 아슬아슬한 기적 겉은 사실이 아닐 수 없다. 1937년에서 1945년까지의 사건기록이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1938년 우리말과 글의 교육과 사용을 금지함.
1938년 간송 전형필 최초의 근대식 박물과 보화각 설립.
1939년 2월 김태준 경성제국대학에서 강의함.
1939년 이용준 《훈민정음》 해례본 매각 의사 밝힘.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 이한걸가에 보관 중 발견.
1940년 1월 3일 조선일보 2년에 언해본 <세종어제훈민정음> 보도.
1940년 일본 창씨개명 단행.
1940년 《훈민정음》 발견.
1940년 7월 30일 조선일보. 4면에 《훈민정음》 <해례본> 유일하게 보도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1941년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김태준 검거됨.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1945년 일본패망.
1945년 대한민국 광복.

나) 《훈민정음》 <해례본>은 어떤 과정을 거쳐 발견되었는가?
《훈민정음》 <해례본>은 경북 안동 어느 고가에서 이용준에 의해 반포된지 494년 만에 발견되었다. 그는 이 책을 그의 스승 천태산인 김태준에게 알렸고 천태산인은 다시 간송 전형필 씨에게 알렸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행방을 애타게 기다려온 간송은 일제의 삼시를 부릅쓰고 책을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소장자는 간송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책값으로 1,000원을 불렀는데. 간송은 10배인 11,000원을 지불하고 <해례본> 원본을 인수하였다. 그 당시 기와집 한 체의 값은 1.000원이었다. 간송은 이 책이 귀한 책이기 때문에 기와집 열채에 해당하는 충분한 값을 지불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간송은 책값으로 책 주인에게 10,000원원을 주었고. 소개한 사람에게는 1,000원을 소개비로 주었다고 한다.
1940년 한여름 7월 30일 조선일보 4면에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494년 만에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36세였던 방종현에 의해 《훈민정음》 <해례본>의 실체가 처음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방종현과 홍기문은 이 《훈민정음》 <해례본>의 번역문을 1940년 8월 4일까지 수차례 연재하였고. 6일 후 조선일보는 8월 10일 폐간되었다.

그리고 나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 전형필이 사들인 뒤에 지금까지 성북동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62년 12월 대한민국 국보 제 70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복원과 오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될 당시 표지와 맨 두 장이 의도적으로 찢겨져 산질되어 있었다.
학자들은 이 네 면이 뜯겨져 나간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연산군의 한글 탄압 때 《훈민정음》 <해례본> 소장자에게 화를 입힐까봐. 그 화를 피하고 책을 감추기 위해 뜯어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낙장 된 부분은 누군가에 의해 필사하여 네 면 모두 메꿔져 있었다.

이것은 이한걸의 셋째 아들이며.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깊었고. 선정에 입선한 경험이 있는 서예가 이용준이 직접 써서 보완하였던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없어진 부분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되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소실된 부분을 붓글씨로 직접 써서 없어진 부분을 채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복원하는 과정에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의 <어지>마지막 글자 ‘이’를 ‘의’로 잘못 기록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내용을 맨 처음 한 눈에 발견한 사람은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이었다고 전한다.

17. 《훈민정음》은 왜 세계의 글자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되는가?
1) 《훈민정음》은 제자원리가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초성. (첫소리. 자음. 닿소리)은 모두 오름 체계(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로 17개 음소로 되어 있다. 닿소리는 낱개의 소리가 발음되어 나오는 부분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한자 육서의 상형을 원칙으로 글꼴을 만들었다.
중성(가운데 소리. 모음. 홀소리)은 천 ‧ 지 ‧ 인의 삼재를 본떠서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어 ‧ 가 되고. 땅은 평평해서 ㅡ가 되며.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서 있어  ㅣ가 되는. 한자의 상형의 원칙으로 글꼴을 만들었다.

2) 《훈민정음》은 사용방법이 정해져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처음 만든 문자 《훈민정음》의 사용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당시 상용하던 문자인 한자와 한문을 이용하여 그 사용 방법을 세상에 알렸다. 그때 알리기 위하여 만든 책이 《훈민정음》 <해례본>인데. 문자 가운데 유일한 사용방법의 기록이다.

3) 《훈민정음》은 활용에 필요한 해설서가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새 문자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은 집현전의 여러 각자들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을 잘 알 수 있도록 해설서를 쓰게 하였다. 사상적. 음운학적 배경과. 제자원리. 서사법. 성음법. 종성법에 관한 상세하게 풀이한 그 해설서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4) 《훈민정음》은 만든 사람이 분명히 밝혀져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세종이 직접 계획하고. 연구하고. 완성하였고.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을 받아 반포한 세종이 친제한 문자이다.

5) 《훈민정음》은 반포할 당시의 초간본이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세상의 모든 문자는 만든 사람은 물론 창제 목적과. 동기와. 과정과. 완성을 모르기 때문에 반포의 전 과정. 또한 알 수 없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창제자인 세종이 직접 창제 목적과 동기. 원리. 법칙 등을 밝힌 해설서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있다. 그 원본이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6) 《훈민정음》은 완벽한 대표 표음문자이다.
영어. 스페인어. 불어. 독일어 등은 대부분 로마자를 문자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자 알파벳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문자는 표음문자이다. 한글 또한 대표적인 표음문자로써 모든 소리를 다 기록할 수 있는 완벽한 소리문자이다.

7) 《훈민정음》은 완벽한 음소문자이다.
표음문자는 단어문자. 음절문자. 음소문자. 자질문자로 나눌 수 있다. 《훈민정음》은 앞의 모든 문자 규정을 다 갖추고 있는 문자이다. 특히 영국의 샘슨 교수가 《훈민정음》은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라는 주장은 크게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8) 《훈민정음》은 통치 중인 왕이 직접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어진 왕이었고. 깊고 오묘한 학문적 자질과. 바다같이 학식이 풍부한 왕이었다. 어떤 난관도 쉽게 헤치고 나갈 지혜의 왕. 너그러운 인품을 지닌 덕성을 지닌 성군이었다. 통치자 세종은 백성들이 마음 놓고 문자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새 문자를 만들었다고 《훈민정음》의 정음편 <어지>에 기록해 놓았다.

9) 《훈민정음》은 왕이 백성들의 편리한 언어생활을 목적으로 만든 유일한 문자이다.
세종은 애민정신이 강한 왕이었다. 모든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쉽게 배우고 익혀서 언어와 문자 생활에 불편함이 없고. 삶이 윤택해질 수 있도록 새 문자를 만들었다.

10) 《훈민정음》은 우리말뿐만 아니라 한자음도 표기할 수 있는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백성들의 언어와 문자생활을 편하게 하려고 만들었다. 또한  우리말 최초의 운서 <동국정운>을 편찬하여 당시 혼란했던 와전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훈민정음》으로 기록하고. 91운 23자모 체계로 만들었다.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이개 등의 학사들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모든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을 적용하여 바로 잡았다.

11) 《훈민정음》은 글자의 왼쪽에 점을 찍어 소리를 구분한 유일한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성조를 구분하기 위하여 글자의 왼쪽에 점을 찍어 사성 곧. 평성. 상성. 거성. 입성으로 나누었다. 이 때 찍는 점을 ‘방점’이라 말한다.

12) 《훈민정음》은 문자의 활용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소문자이다.
《훈민정음》은 물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와 같은 자연의 소리와 동물들의 우짖는 소리. 노래하는 새소리. 사람들이 음성으로 표현하는 상징어(의성어. 의태어) 등 소리를 다 기록할 수 있다.

13 《훈민정음》은 문자의 활용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최고의 음소문자이다.
음소문자는 어절문자나 음절문자 보다 문자의 활용 면에서 효율적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문자의 다양한 활용을 통해 불가능한 표기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문자인 것이다. 자음만으로도. 모음만으로도 이미지를 전할 수 있다. 로마문자권도 음소로 표기가 가능하다

14) 《훈민정음》은 종성. 곧 받침이 있는 유일한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모아쓰기의 원칙으로 한 음절 안에 초 ‧ 중 ‧ 종성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은 쓰기 쉽고. 읽기도 편하고. 배우기 쉬운 글자가 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은 붓글씨로 썼을 때 아름다운 것은 종성 곧. 받침이 있기 때문이며. 단조로움을 피하고 구성을 멋있게 할 수 있다.

15) 《훈민정음》은 음소문자 가운데 2단계와 3단계의 자형 구조를 쓰는 유일한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2단계 또는 3단계의 표기법을 쓴다. 그리고 자형구조에 따라 6가지 방법으로 자형을 이룬다.

가) 상하의 자형 구조이다.
‘호’ ‘투’ 자와 같이 ‘ㄱ’ ‘ㅎ‘ + 모음 ’ ㅗ‘. ’ ㅜ‘를 붙여서 항하로 이뤄진 자형구조이다.

나) 상하의 자형 구조에 다시 자음(받침)을 아래에 붙이는 구조이다.
‘불’ 자와 같이 자음 ‘ ㅂ’의 아래 모음 ‘ㅜ’를 붙여 음절 ‘부’를 만들고. 다시 그 음절 ‘부’ 밑에 자음 ‘ㄹ’을 붙여 받침 있는 음절 ‘불’을 만드는 자형구조이다.

다) 좌우의 자형구조이다.
‘마’ 자와 같이 자음 ‘ㅁ’의 오른쪽에  모음 ’ㅏ‘를 붙여 음절 ’마‘를 만드는 자형구조이다.

라) 좌우의 자형구조에 다시 자음(받침)을 아래에 붙이는 자형구조이다.
‘향’자와 같이 자음 ‘ㅎ’에 모음 ‘ㅑ’를 우측에 두고. 다시 음절 ‘햐’ 밑에 자음 ‘ㅇ’을 더하여 받침 있는 음절 ‘향‘을 만드는 방법이다

마) 상하의 자형구조에 모음을 우측에 붙이는 자형구조이다.
‘좌’ 자와 같이 자음 ‘ㅈ’ 에 모음 ‘ㅗ’를 붙여 ‘조’를 만들고. 다시 우측에 ‘ㅏ’를 붙이면 ‘좌’ 가 되는 자형구조이다.

바) 상하의 자형구조에 모음을 우측에 붙이고 다시 자음(받침)를 붙여 이루는 자형구조이다.
‘꿩’ 자와 같이 자음 ‘ㄲ’에 모음 ‘ㅜ’를 붙여 ‘꾸’를 만들고. 다시 우측에 ‘ㅓ’를 붙이면 ‘꿔’가 된다. 다시 자음(받침) ‘ㅇ’을 붙여 ‘꿩’을 만드는 구조이다.
《훈민정음》의 모든 글자는 이 여섯 가지의 자형구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이렇게 2단계와 3단계의 자형을 구성하여 음을 이루는 방법을 쓰는 유일한 문자이다.

16) 음소 하나하나를 나누어서 정확하게 분류할 수 있는 문자 체계는 《훈민정음》 하나뿐이다.
로마자 알파벳은 횡으로 자모가 계속 연결하여 글자를 만드는데. 《훈민정음》은 아래로 붙이는 방법과 옆으로 붙이는 방법으로 글자를 만든다. ‘ㅡ‘ 모음과 ’ㅣ‘ 모음의 성음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매우 독특한 자형을 이룰 수 있다.

17)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문자에서 음절과 음소를 분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에는 음절을 다시 음소로 세분하여 분류하고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임금인 세종이 유일한 사람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의 모든 과정이 그 증거이다.

18) 《훈민정음》은 창제된 문자 가운데 현재 사용하는 유일한 문자이다.
문자의 역사에서 문자를 만든 사람은 많지 않았다. 크릴라이 칸의 명으로 티베트 라마승 파스파가 만든 표음문자.<파사파 문자>가 있고. 존 로널드 루옐 돌킨이 만든 자질문자의 대표인 <탱과르 문자>도 있다.

그리고 측천무후가 만들고 보급한 <측천문자>는 당 예종 때 (689년) 창제하고 반포되었다. ‘측천신자’ 또는 ‘무후신자’라고도 부른다. <특천문자>는 문자라고는 하지만 기존의 한자와 완전히 다른 문자가 아닌. 한자의 제자원리를 따라 만든 특수한 한자라 할 수 있다.
새 문자 보급을 위해 <자해>라는 책을 편찬했으나 오늘날 이 책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 시기에 만들어진 석각. 비첩. 불경 들을 통해 그 문자를 확인할 따름이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자기의 원활한 통치를 위하여 인위적으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려 했지만 무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꾸준한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부러움을 한껏 받으며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는 문자는 한글 곧.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 《훈민정음》은 자질 ‧ 음소 ‧ 음정 ‧ 단어문자의 모든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은 유일한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단어문자. 형태음소문자. 음절문자. 음소문자. 자질문자의 속성을 모두 갖춘 유일한 문자이다. 이것은 문자분류학적으로 볼 때 아주 드문 현상으로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훈민정음》의 그런 점이 세계의 문자로서의 인증이 되는 것이다.

20) 《훈민정음》은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쉽게. 빠르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의 제자원리도 다르고 글자형태가 뚜렷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간단하기 때문에 《훈민정음》 곧. 한글을 처음 배우고 익히는데 매우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최근 서양 사람들 중에는 50분 만에 배운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은 빠르면 한나절 만에 배울 수도 있고. 늦어도 열흘이면 거뜬히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문자이다. 《훈민정음》은 세상의 모든 문자 가운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인 것이다.

21) 《훈민정음》은 가장 과학적으로 만든 문자이다.
문자가 무슨 과학적이란 말인가?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과학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뚜렷이 어느 부분을 화학적으로 만든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 《훈민정음》 자음의 경우 그 자음이 발음되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점이 과학적이다.

(나) 《훈민정음》의 모음은 천 ‧ 지 ‧ 인의 삼재를 본떠서 만들었다. 하늘은 둥글어 ‧ 가 되고 땅은 평평해서 ㅡ가 되며.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서 있어 l 가 된다. 이 세 기본자가 합하여 초출자 ㅏ. ㅓ.  ㅗ.  ㅜ가 되고 재출자 ㅑ. ㅕ. ㅛ. ㅠ 가 된다. 《훈민정음》은 만드는 과정에서 분명힌 원칙과 원리가 있기 때문에 과학적이라 말할 수 있다.

(다) 《훈민정음》이 소리는 초성. 중성의 2단계의 소리와. 초성. 중성. 종성 3단계로 소리로 나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쓰기 쉽고. 자형이 아름다우며.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것이다.

(라) 《훈민정음》은 병서법. 연서법. 부서법. 합성법을 응용하여 글자의 사용 범위를 넓힐 수 있다.

(마) 《훈민정음》은 음절 합성법을 통하여 거의 무제한적으로 음절을 만들 수 있다. 합성 가능한 최대의 음절수는 모든 문자 가운데 으뜸이다.

(바) 《훈민정음》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며. 체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배우기 너무나 쉽고. 곧 바로 읽을 수도 있으며. 폭넓게 익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올바르게 쓸 수 있고. 아무에게나 널리 가르칠 수 있고. 많은 지식을 깊게 알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사용하며. 백성들의 삶을 넉넉하게 살게 하는 최상의 문자인 것이다.

22) 《훈민정음》을 세계의 언어학자들은 세계 최고의 문자로 선정하였다.
언어학적으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 대학에서 세계 모든 문자들의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실용성 등을 기준으로 하여 순위를 매겨 나열해 놓았다. 그 중에서 제 1위는 자랑스럽게도 《훈민정음》 곧, 한글이었다.

23) 《훈민정음》[한글]은 자질문자적 성격이 가장 강한 문자이다.
자질문자란 문자가 나타내는 음소들의 자질이 그 글자의 외형에 체계적으로 반영되어 있는 문자 체계를 말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 중에서 자질문자적 성격이 가장 강한 문자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 곧 한글뿐이었다.

영국 서섹스 대학의 샘슨 교수가 저술한 <문자 체계>라는 책에서 한국어 음소의 변별적 자질이 한글의 글자 모양에 반영되어 있다는 특징을 성명하기 위해 샘슨이 만든 문자학의 용어이다.
그는 자음의 경우 기본자 ‘ㄱ’에 가획하면 더 센 음인 ㅋ이 되는 것처럼.  ㄴ→ㄷ→ㅌ.  ㅁ→ㅂ→ㅍ.  ㅅ→ ㅈ→ㅊ.  ㅇ→ ㆆ→ㅎ와 같이 동일계열의 음소를 파생해 낸다. 그리고 모음의   경우도 가점을 원칙으로 ‧를 ㅡ와ㅣ에 붙어 ㅗ→ㅛ. ㅏ→ㅑ. ㅜ → ㅠ.  ㅓ →ㅕ의 동일 계열의 음소를 파생해 낸다고 설명하였다.

샘 교수는 《훈민정음》의 이러한 문자 체계를 대단히 체계적이고 매우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그는 또 이러한 분류 방법은 세계 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현재 상용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자질로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여러 가지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한글이 자질문자라는 하나의 문자 유형으로 설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심도 있는 연구와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24) 《훈민정음》곧. 한글은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다.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한』이란 기사에서 ‘한국에서 쓰는 한글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 라고 극찬한 바 있다.

25) 《훈민정음》은 이룰 수 있는 음절의 수가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많은 문자이다.
동국대학교 컴퓨터공학부 변정용 교수의 통계를 보면 《훈민정음》으로 표기할 수 있는 음정수를 쉽게 집작할 수 있다.
가) 《훈민정음》 곧. <한글>로 표기할 수 있는 음절 수
(1) <한글> 음절수 정리
자음은 홑자음 14개(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와 쌍자음 5개( ㄲ. ㄸ. ㅃ. ㅉ)를 합하여 19개이다.
모음은 기본자 2개와 초출자 4개. 그리고 복모음 11개를 합하여 모두 21개( ㅏ.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ㅐ.ㅒ .ㅔ ㅖ. ㅘ. ㅙ. ㅚ. ㅟ. ㅝ.ㅢ)이다.
밭침은 홑자음 14개. 쌍자음 2개( ㄲ. ㅆ). 합용 밭침자11개(ㄳ .   ᆬ.   .ᆭ . ᆰ. ꥨꥩ. ꥬ. ㄾ. ㄿ. ㅀ. ㅄ).를 합하여 27개이다.
위의 자모로 만든 수 있는 한글 음절수를 변정용 교수의 계산법으로 계산해 보았다
초성(19)과 중성(21)이 합하여 이뤄진 음절수는 399자(19×21)이다. 초성과 중성과 종성이 합하여 이뤄진 음절수는 12,773자이다.
이 둘을 합하면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 자모로 표기 가능한 음절수를 계산해 낼 수 있다. 그 음정의 총수는 11.172자에 이른다. 한편 중국어는 400 여개이며. 일본어는 약 300개 정도라고 한다.

(2) 《훈민정음》이 음절수 정리
《훈민정음》의 음절수는 그 창제원리인 연서법. 병서법. 부서법. 성음법. 그리고 초성과 중성과 종성을 각각 2자 밑 3자를 합용하여 합자해를 적용하면 약 398억 자 정도의 음정을 표기할 수 있다.
《훈민정음》은 자모 28자 중 초성자음 17자 중성모음 11자 종성자음17자가 기본이 되어 초성. 중성. 종성의 자모음이 각각 최대 3회까지 합자하여 확정하도록 창제되었다.
자음은 각자병서뿐만 아니라 세 자음 합용병서로 확정할 수 있고. 모음 또한 초출자에 이어 재출자와 세 모음을 합쳐서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초성에 쓸 수 있는 자음 수는 5.219자이고 중성에 쓸 수 있는 모음 수는 1.463자이며. 종성에 쓸 수 있는 자음 수는 5.219자이다.

따라서 초성. 중성. 종성으로 쓸 수 있는 자모음을 합자해서 만들 수 있는 음정을 모두 합하면 39.849.36.943자(5219×1463×5219)가 된다. 여기에 초성과 중성만으로 합자 가능한 음절수는 7.635.397자가 되는데 이 둘을 합하면 39.856.772.340(삼백구십팔억 오천육백칠십칠만 이천삼잭사십자)가 된다.
온 천하의 모든 문자를 분석해도 《훈민정음》과 같이 많은 음절수를 가진 문자는 없다. 오직 《훈민정음》만이 유일하다.


26) 유네스코에서는 <한글>을 소수민족의 문자로 하용하게 하자.
소수민족들은 자기들의 말을 기록할 수 있는 문자가 없다. 따라서 모든 소리를 다 기록할 수 있는 문자인 《훈민정음》을 채택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을 국제 음성기호로 채택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27) <한글>이 제 1차 세계문자 올림픽에서 1등을 차지했다.
2009년 10월 5일~7일까지 서울에서 한국. 일본. 중국. 이탈리아. 인도. 라오스. 태극. 미얀마. 캄보디아. 히브리어. 아르메니아어. 이집트어아라비아어. 스리랑카어. 몽골어 등 16개국 17개 언어를 대상으로 제 1차 세계문자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각각의 언어의 탄생 배경. 음성학적. 음운학적 특징 및 문자 형태. 학습의 용이도. 현대 디지털문화에 적합한 속도성. 의미 전달의 수월성. 편의성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하였다. 그 결과 한글 곧. 훈민정음이 1등을 차지하였다.

18. 《훈민정음》곧 <한글>을 세계 언어문자학자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미국의 여류작가 펄벅은 그의 소설<살아있는 갈대>의 서문에서 ‘ 《훈민정음》 곧. 한글은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이다.’ 라고 높이 평가했다. 이글은 1996년 10월 7일 조선일보에 실렸다.

나) 미국 켈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제래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미국의 유수한 과학잡지인 <Doscover> 지 1994년 6월호에 이래의 글을 실었다. 그는 ‘《훈민정음》은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자모체계이며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이다. 《훈민정음》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그리고 ’《훈민정음》 간결하고 우수하여 한국인의 문맹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 라고 주장하였다.

다) 영국의 역사학자이며 역사 다큐멘타리 작가인 존 맨은 《훈민정음》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며 단순하고 효율적이다. 세련된 이 알파벳은 가히 알파넷의 대표적인 전형이며.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이다.‘ 라고 극찬하였다. (남경태 역, <세상을 바꾼 문자 알파벳>)

라) 영국의 문자학자 제프리 샘슨은 그의 저서 <세계의 문자 체계>에서 ‘《훈민정음》 [한글]은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지적 성취 가운데 하나인 이론의 여지가 없다.’ 라고 주장했다.

마) 미국 하버드대학교 라이사워 교수는 ‘한국인들은 전적으로 독창적이고 놀라운 음소문자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세계 어떤 나라의 문자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이다.’라고 극찬했다.

바) 1996년 프랑스에서 세계 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들은 ‘한국어 곧. 《훈민정음》 곧 한글을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을 하였다.

사) 독일 함부르크대학교 한국학 베르너 사세 교수는 ‘서양이 20세기에 들어서 완성한 음운이론을 세종은 그보다 5세기나 앞서 체계화했고 한글은 전통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한 세계 최고의 문자이다.’라고 강조했다.

아) 도쿄 외국어대학 우메다 히로유키 교수는 ‘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이며. 로마문자보다 발달한 한층 차원 높은 자질문자.’하고 주장하였다.

자) 시카고 대학의 메콜라 교수는 ‘《훈민정음》은 현존하는 문자 체계 가운데 가장 독창적으로 창조된 것이며 그것은 세계의 문자 체계 속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한글은 문장을 단어로. 음절로. 그리고 음소로 분해하며.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음질문자의 형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문자체계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 그는 ‘우리 언어학계에 이렇게 놀라운 성과를 이룬 날을 우리의 휴일로서 축하하며. 잔치를 여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라며 《훈민정음》 창제일을 기념할 것을 제안하였다. (KBS1. 96.10.9)

카) 독일의 언어학자 쿨로리안 쿨마스 는 2003년 그의 저서<Wrieing System.2003>에서 한글의 ‘자질문자론을 펼치며 한글은 음정. 음소. 자질로 나눌 수 있는 최고의 문자임을 평했다. 그리고 배우기 아주 쉬운 문자라고 주장하였다.

파) 구글 뉴욕의 연구 과학자이며. 텍스트를 말로 바꾸는 컴퓨터 직업 전문가인 리차드 스프로트는 ‘한글은 발성기관을 본떠 만든 최초의 문자이다. 그리고 한글은 며칠이면 쉽게 배울 수 있는 우수한 문자이다.’ 라고 평가하였다.

하)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은 ‘문자를 통해 정보를 체계화하겠다는 시도가 600년 전에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외에도 《훈민정음》에 대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 언어 문자학자들은 많이 있다. 위의 《훈민정음》에 대한 평가를 요약 정리하였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합리적인 문자이며 가장 과학적인 표기체계이며. 가장 독창적이며. 인류의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이며.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다. 《훈민정음》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문자이며. 정통철학과 과학이론이 결합한 세계 최고의 문자이며. 음질문자의 형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문자체계이며. 모든 문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글자이며. 세계적인 발명품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을 세계 공통어로 쓰면 좋지 않을까?

19.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와 여러 규정
가) 《훈민정음》의 제자원리
1) 자음의 제자원리
(가) 음성 발음기관의 본뜸의 원리에 따라 기본 자음과 ㄱ. ㄴ. ㅁ. ㅅ. ㅇ의 5기를 만들었다.
(나) 가획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기본자에 획을 더하여 ㅋ. ㄷ. ㅂ. ㅍ. ㅈ. ㅊ. ㅇ. ᅙ. ㅎ. ᅀ을 만들었다
(다) 소리의 세기를 따라 글자의 모양에 반영하고 획을 더하여 다른 자음자를 만들었다.
(라) 같은 발음기관에서 나는 소리여서 소리의 성질이 유사하며 글자의 모양에 비슷하다. 샘슨이 주장한 한글의 자질문자론은 가획의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모음의 제자원리
《훈민정음》<해례본>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가) 중성. 곧 모음의 사상적인 배경은 천 ‧ 지 ‧ 인 삼재를 음양오행설의 원리를 따라 만들었다. 그리고 중성의 음양은 하늘의 이치임을 설명하고 있다.

(나)중성은 모두 열한 자인데. ‧ 는 천. ㅡ는 지. ㅣ는 인. 삼재를 본뜬 것임을 설명하고. 중성의 음성적 특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다) 중성은 합성의 원리로써 기본자 ㅡ와 ㅣ에 ‧ 를 가점의 원리를 적용하여 초출자 ㅏ. ㅓ. ㅗ. ㅜ와 제출자 ㅑ. ㅕ. ㅛ. ㅠ의 여덟 자모를 만들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  《훈민정음》의 합성 원리
1) 병서법
같거나 다른 자음을 나란히 쓰는 방법을 나란히 쓰기. 곧 병서법이라고 말한다. 병서법은 초성과 중성에서 같은 방법으로 쓰인다. 그리고 병서는 각자병서와 합용병서로 나뉜다. 각자병서는 같은 자음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이고. 합용병서는 다른 자음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이다. 합용병서는 다시 이자병서와 삼자병서로 나뉜다.

2) 연서법
연서법은 ‘이어쓰기’이다. 연서는 자음을 위 아래로 이어 쓰는 것을 말한다. ㅱ. ㅸ. ㅹ. ㆄ과 같이 쓰는 것을 순정음이라 하는데. 언해본에는 ‘입술가벼운 소리’라고 번역하였다.

3) 부서법
부서법은 ‘붙여쓰기’이다. 모음에서 ‧. ㅡ. ㅗ. ㅜ. ㅛ. ㅠ는 자음 아래 붙여 쓰고. ㅣ. ㅓ. ㅓ. ㅑ.  ㅕ는 자음 오른쪽에 붙여 쓴다. 예를 들면 ㄱ + ㅜ 는 ‘구’자 되고. ㅎ + ㅓ 는 ‘허’가 되는 원리이다.

다)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
1) 자주정신
우리말은 뜻글자인 한자를 문자로 사용할 수 없는 언어적 구조를 가졌다. 따라서 언어생활의 불합리와 부조화를 극복할 문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말은 있으나 기록한 문자가 없다는 것은 사람이 마음껏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없고.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을 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손실은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의사와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회적인 약속이나 규율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국가의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도 우리말에 맞는 문자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환경 속에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는 세종은 중국의 한자와 전혀 다른 우리의 말과 합치된 문자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완벽한 소리문자인 《훈민정음》이 탄생된 것이다.
(國之語音異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중국의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2) 애민정신
세종 때의 백성들의 문자 생활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기득권층과 사대부들은 한자 ‧ 한문을 불편 없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못하는 한자 한문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없는 중인들은 잘 통하지 못하는 이두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두 또한 한자를 차용한 문자 생활이기 때문에 한자 ‧ 한문의 불편함과 동일한 언어생활이었다.
그러면 중인 이하의 백성들은 어떤 문자생활을 하였을까? 그들은 문자를 전혀 모르는 문맹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백성의 절반 이상이 문자를 모르기 때문에 어제의 기술과 지식을 구전 하나만 믿고 이어받으며. 오늘날 부정확하게 사용하다가. 다시 구전으로 앞날의 사람들에게 불분명하게 전달해 주는 삶에 살 수 밖에 없었다. 어제와 오늘. 오늘과 앞날이 온통 뚜렷하지 못한 삶을 살았고 변질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세종은 문자가 어려워서 자기의사를 마음껏 펼칠 수가 없었던 백성의 삶을 안타깝게 여겼던 어질고 인자한 성품의 통치자였다. 성군 세종은 군왕으로서는 품기 어려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곧. 편민정신과 애민정신으로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다.

故友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子爲此憫然
<그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측은히 여겨>

3) 창조정신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치. 행정.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천문. 의학. 철학. 음악. 문화. 서적 편찬. 영토 확장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흥왕한 시기는 세종 시대였다. 여러 분야에 걸쳐 발명과. 발전과. 장려와 확장과. 편찬과. 창제가 수없이 이워졌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업적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들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꼽는다. 이에 대하여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훈민정음》은 종래에 있던 문자를 재활용하거나. 약간의 변용을 통하여 만들어진 문자가 아니었다. 문자가 전혀 없는 전무한 상태에서 새로운 글자를 만든 것이다.
실제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도 위대한 문자이지만. 그 글자를 있게한 우리말 또한 훌륭하다는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이 좋아야 글자도 좋고. 글자가 좋아야 글과 문장이 좋은 것이다. 말과 완전히 합치하는 문자를 인위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일이다. 새로 만든 스물여덟 자로써 세상의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의 《훈민정음》의 창제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의 위대한 창조적인 정신세계에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新制二十八字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4) 실용정신
세종은 국민의 언어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배우기 쉽고. 쓰기 편안한 문자 《훈민정음》 28자모를 만들었다. 세종의 너그럽고. 사려깊은 편민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통해서 추구하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였던 것이다.
세종의 훌륭한 정치력은 계층을 가리지 않는 인간미에 있었다.
《훈민정음》은 그 상용을 반대하는 계층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은근하게 활용하는 이중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실제로 <운회언해>. <홍무정운역훈>. 언해본 《훈민정음》. <농업경언해>. <두시언해> 등 언해문학이 꽃을 피우게 된 것도. 《훈민정음》의 가장 큰 역할이었다. 그러나 상기의 언해문학은 평민들을 위한 기록물이 아니었다. 사대부들이. 사대부들에 의한. 사대부들을 위한 문학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모순된 언어 사상을 가지고 《훈민정음》의 사용에 이중성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한자 ‧ 한문을 사용하는 기득권이나 사대부들에게도. 문자를 몰라 한글만을 사용하는 평민들에게도. 똑같이 필요한 문자이길 바랐다.
欲使人 易習 便於日用耳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라) 《훈민정음》의 사상적 배경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자음에 적용된 주역의 오행의 원지와 모음에 적용된 성리학의 심재의 원리가 그 배경 사상이다.

1) 자음
《훈민정음》의 제자원리는 주역의 오행을 바탕으로 5자음의 체계(아. 설. 순. 치. 후)를 완성하였다. 《훈민정음》의 오음은 상형의 원리를 따라 17자를 만들었으며. 어금니 소리인 아음. 혀소리인 설음. 입술 소리인 순음. 이 소리인 치음. 목구멍 소리인 후음의 체계로 구성 되어 있다.

2) 모음
《훈민정음》 모음의 제자원리 가운데 사상적인 배경을 성리학이며. 음운학적인 배경은 중국의 운학이었다. 중국 운학의 대표적인 책은 <홍무정운>인데. 《훈민정음》의 창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철학적 배경은 성리학의 이론인 삼극지의와 이기지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여기서 삼극은 천 ‧ 지 ‧ 인의 삼재를 말하고 이기는 음 ‧ 양을 말한다.
《훈민정음》 모음의 제자원리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우주 운행의 원리인 음양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음양 ‧ 인 하늘[천]과 땅[지]. 그 사이에 사람[인]을 두어  천 ‧ 지 ‧ 인의 조화를 이루려 하였다.

마) 성조와 사성법
1) 성조
중국의 한자는 음절문자이기 때문에 동음이의어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뜻이 담긴 음절의 문자를 무한정으로 만들어야만 새로운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다. 육서의 자원 분류에 따라 전주에 해당하는 자는 같은 음을 가졌기 때문에 여러 글자들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때 찾은 자의 구별 방법이 성조였다.
글자의 소리를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의 네 종류로 분류하여 모서리에 표시점을 찍어. 글자 발음의 높낮이와. 장단과. 상승과. 하강과 세기를 구별하였다. 그렇지만 중국의 한자는 운서나 자전에서만 사성을 구분하였고 실제의 문장에서 글자에는 사성을 구분하는 표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2) 사성법
세종은 <홍무정운> 연구의 최고의 권위자답게 《훈민정음》이 창제될 때부터 중국의 성조를 받아들여 음절의 소리를 구별하려고 했다. 소리를 네 종류. 곧 평성. 상성. 거성. 입성으로 분류하였다. 이것을 사성법이라 한다.

이 때 글자의 왼쪽에 찍는 점을 ‘사성점’이라고 말하는데. 거성은 한 점. 상성은 두 점. 평성은 점이 없고. 입성은 점찍는 것은 같은데 빠르다. 입성은 글자의 받침이 ㄱ. ㅋ. ㄷ. ㅌ. ㅂ. ㅍ. ㅅ. ㅊ. ㅎ의 무성음인 경우를 말하며. 거성적 입성(1)점. 상성적 입성(2점). 평성적 입성(없음)으로 나눌 수 있다.

일본의 한글 연구학자인 노마 히데기는 초성. 중성. 종성에 성조까지 포함해 한글을 사분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보면 사성법의 규정은 매우 중요한 성조 구별법이었다.
《훈민정음》의 사성법은 중국의 성조를 빌려 글자를 구별하려는 의도였다. 그렇지만 글자의 왼쪽에 찍은 점의 수자로써 소리를 구별하려는 사성법의 시도는 세계의 문자 역사에 유례가 없는 기발하고 독특한 성조의 원리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음이의어가 많지 않은 《훈민정음》 곧 한글에는 사성법의 필요가 그렇게 절박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 글자의 성조에는 맞지 않는 규정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의 성조는 점점 소멸되어 갔다.

3) 방점
《훈민정음》의 성조를 구분하기 위하여 글자의 왼쪽에 점을 찍어 구분하였다. 이 때 찍는 점을 ‘방점’이라 말한다.

바) 《훈민정음》 초성과 중성의 음가
《훈민정음》의 <정음편>에는 어제 서문인 <어지>와 <예의>가 있다. <예의>에는 초성과 중성이 음가를 한자의 음을 빌어 예시 기록하고 있다.

1)초성의 음가
초성을 23 자음 체계로 소리 값을 분유하였고. 소리의 성질을 5가지로 분류하여 획이 가해질수록 소리의 세기가 강해짐을 표현하였다. 초성 23자모 체계를 같은 소리끼리 분유하면 전정 ㄱ. ㄷ. ㅂ. ㅈ. ㅅ ᅙ). 전탁 ㄲ. ㄸ. ㅃ. ㅉ. ㅆ. ᅙᅙ). 차정(ㅋ. ㅌ. ㅍ. ㅊ.ㅎ). 불청불탁( ᅌ. ㄴ. ㅁ. ㅇ. ㄹ. ᅀ)으로 나눌 수 있다.

2) 중성의 음가
모든 문자 가운데 우리말은 모음이 가장 발달한 문자이다. 기본 중성자의 소리의 특성을 분류하면. ‧ 는 혀를 오그리고 내는 깊은 소리이다. ㅡ 는 혀를 조금 오그리고 내는 깊지도 얕지도 않은 소리이다. ㅣ는 혀를 오그리지 않고 내는 얕은 소리이다. 하늘이 둥근 모양을 본떠 만든 ‧를 ㅣ 와 ㅡ 에 하나를 붙이면 초출자(단모음) ㅏ. ㅓ. ㅗ. ㅜ가 되고. ‧를 ㅣ와 ㅡ에 점 둘을 붙이면 제출자. 이중모음)  ㅑ. ㅕ. ㅛ. ㅠ가 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사) 《훈민정음》의 종성법
세종의 글인 《훈민정음》 <정음편> <예의>의 종성법에는 ‘종성부용초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모든 자음은 받침으로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집현전 학사들이 지은 《훈민정음》 <해례본> <종성해>의 기록을 보면 ‘그래서(종성은)  ㄱ. ᅌ. ㄷ. ㅂ. ㅁ. ㅅ. ㄹ의 여덟 자만으로 넉넉히 쓸 수 있다 (ㄱ. ᅌ. ㄷ. ㅂ. ㅁ. ㅅ. ㄹ)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간추린 노래의 기록을 보면 ‘자음을 종성에 씀은 이치가 본래 그러한데 다만 여덟 자만  가지고도 쓰임에 막힘이 없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1940년 이전까지는 <예의>의 기록만 보고 ‘종성부용초성’ 곧
‘모든 자음은 받침으로 다시 쓸 수 있다’는 기록이 원칙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해례본>이 발견된 뒤에 종성해의 기록을 확인한 뒤로 종성법에 대한 규정은 크게 변화를 가져왔다.

아) 《훈민정음》의 이영보래
<동국정운>은 세종의 명으로 세종 29년(1447년)에 집현전 학사들인 신숙주. 최항. 성삼문. 박팽년등이 편찬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이다. <동운정운>은 다음해 세종 30년에 간행 되었다. 신숙주가 쓴 <동국정운>의 서문에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又於質物 諸韻 以影補來 因俗歸政)
<또 질과 물 두 운은 영모로써 래모를 보충하여 속음을 따르면서 바름으로 돌아가게 하니>
세종 때 월. 질. 별. 물 등의 한자는 중국에서는 웓. 짇. 볃. 묻으로 읽는데. 입성으로 분류되었다. 다시 말해 ㄷ받침을 가진 무성음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유성음인  ㄹ받침으로 심각한 문제로 여겼고. 문자의 타락으로 여겼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영모 ‘ᅙ을 레모 ’ㄹ’ 뒤에 붙여 영모로써 래모를 보충하면 입성이 되어 중국 한자음과 동질의 음운이 되게 한다는 규정이다.
이영보래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의 대표적인 특징이었다. 그러나 이미 변한 말을 인위적으로 노력이나 규정으로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따라서 《훈민정음》 반포 초기의 기록에만 남아 있을 뿐.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점점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자) 《훈민정음》의 성음법
《훈민정음》의 성음법은 《훈민정음》 <예의>와 <해례>의 <합자해> 두 곳에 기록되어 있다. 음운과 음운이 소리. 곧 음절이 이뤄지는데. 음정 단위로 묶어 쓰는 규정이다. 성음법은 《훈민정음》 <해례본> <합자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어지의 내용이다.
(凡字必合而成音)
<무릇 글자는 반드시 합하여야만 음절을 이룬다.>

다음은 <합자해>의 기록된 내용이다. 초성 ‧ 중성 ‧ 종성이 합하여 글자가 되는 방법. 서사법. 부서법. 연서법. 병서 등이 정확한 예를 들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차)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
<동국정운>은 중국의 한자음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하여 세종의 명으로 세종 30년(1448년)에 간행 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다 명나라 운서 홍무정운을 참고하여 만들었고. 전6권 6책으로 91운 23자모는 《훈민정음》 초성 체계와 동일하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의 특징은
첫째. 모든 자음은 초성. 중성. 종성을 갖춰서 적었다. 가와 같이 받침이 없는 날도 음가 없는 ㅇ 을 억지로 붙여 초 ‧ 중 ‧ 종성의 완전한 음절을 이루도록 하였다.
줄째. 초성으로 발음할 수 없는 ᅀ. ᅌㄲ. ㄸ. ㅆ. ㅉ. ᅙᅙ을 초성으로 사용하였다.
셋째. 이영보래의 규정을 적용하였다.
넷째. ㅗ. ㅛ. ㅜ. ㅠ 밑에 ㅱ 받침 사용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은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인 <동국정운>에 기록된 한자음에 바탕을 둔 표기법이다.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훈민정음》의 초성 ‧ 종성의 음가를 기록한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의 표기법을 따라 적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1446년이고. <동국정운식>은 1447년에 편찬하고 1448년에 간행하였다. 세종 28년에 간행된 책의 기록이 1년 위의 기록의 표기법을 따른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당시는 한자와 한문이 상용되던 시기였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창제와 함께 중국 한자음의 정리를 병행하려고 노력하였다. 세종은 운서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특히 <홍무정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는 정확한 한자음의 기록도 좋지만 와전한자음의 정리 또한 중요한 시정 사항이라 생각하였다.
세종은 정확한 음절 표기가 가능한 문자만이 중국의 한자음을 바르게 적을 수 있고. 바른 한자음의 기록 없인 《훈민정음》의 발음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와 동국정운 편찬의 두 가지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창제와 <동국정운>의 편찬은 나누어 해결할 과제가 아니었다. 두 자지 목표를 동시에 해결하지 않으면 《훈민정음》의 창제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는 새 문자를 이용하여 정확한 한자음을 기록하기 위해 <동국정운>을 함께 편찬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에 기록된 한자음은 <동국정운식> 한자음으로의 기록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법은 현실음과 차이가 많아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점점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카) 《훈민정음》의 표음주의
《훈민정음》의 표기의 원칙을 모든 음절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당시는 현대 음운학이 적용되던 때가 아니었다. 단어의 분류. 체언과 조사의 분류. 어간과 어미의구분이 전혀 없이 연음하여 기록하였다. 따라서 정확한 단어의 뜻을 알아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

타) 《훈민정음》의 음운현상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에는 모든 원칙. 원리. 규정. 규칙 등이 비교적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러다 보니 음운의 변화가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음운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다. 모음조화. 구개음화. 원순모음화. 두음법칙 등 창제될 당시에는 모음조화는 비교적 철저하게 지켜졌다.

첫째. 한 단어 내(순 우리말 단일어)에서 나타난다. 예로 나모(木)와 같은 경우이다.

둘째. 체언과 조사의 결함에서 나타난다. 예로 ᄇᆞᄅᆞᆷ(체언) + 에(조사)은 ᄇᆞᄅᆞ매가 된다.

셋째. 어간과 어미의 결함에서 나타난다. 예로 먹다에서 먹(어간) +어(어미)는 ‘먹어’가 된다.

넷째. 어근 접사의 결함에서 철저하게 지켜졌다. 예로 꽃(어근)  + 답다(접사)는 ‘꽃답다’가 된다

2) 구개음화
구개음화는 ‘ㄷ’ 자음이 구개모음 ‘ㅣ’를 만나면 구개자음  ‘ㅈ’으로 변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듕귁 > 중국. 죻다 > 좋다와 같은 경우이다.

3) 원순모음화
원순모음화는 순음 ㅁ. ㅂ. ㅍ이’ ㅡ를 만나면 원순 모음 ㅜ로 변하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믈 > 물. 블 > 불  플 >풀과 같은 경우이다.

4) 두음법칙
예를 들면 례절 > 예절. 로인 > 노인. 니르고저 > 이 고저 와 같은 경우이다.

파) 《훈민정음》의 서사법
《훈민정음》은 음소문자로 창제 되었지만 알파벳처럼 풀어쓰기가 아니고 모아쓰기를 규정으로 삼아 마치 음절 문자처럼 쓰도록 하였다. 《훈민정음》의 모아쓰기는 한자의 반절 발음표기법의 영향이 컸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당시에 상용하던 문자 체계는 한자와 한문이었다. 따라서 한문 서사법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훈민정음》은 모아쓰기 원리로 종성. 곧 받침을 만들어 지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1) 세로쓰기 [종서법]
《훈민정음》의 서사법은 가로쓰기가 아니고 세로쓰기[종서]였다. 근대 이전 동양 여러 나라의 한문의 사서법은 세로쓰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다만 서예에서 액자 글씨를 쓸 때 우축에서 좌측으로 쓰는 가로쓰기[횡서] 방식이 있었으나 일상의 기록은 모두 종서를 했다. 이것은 서사도구의 영양으로 볼 수 있다. 붓을 사용하여 글씨를 쓰려면 세로쓰기. 곧 종서이어야 원활하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어쓰기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의 문장 쓰기 방식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이어서 쓰기 방식이었다. 이것은 한문서예의 이어쓰기를 받아들여 적용한 서사법이었다. 그 당시에는 문장을 쓰는 필사방법을 이용한 붓을 이용한 서예였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서예를 할 때에는 띄어쓰기보다 이어쓰기를 더 많이 했는데 이것은 이어쓰기가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근대의 문법이 등장하여 단어의 개념과 띄어쓰기의 원칙이 정착되기 전까지 우리 한글의 모든 기록 문서의 서사법은 이어쓰기가 원칙이었다.

20.  《훈민정음》의 명칭
세종 28년 1446년 《훈민정음》이 반포된 이후. 600년 가까이 나라의 말로 쓰였다. 험난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과정에 따라 수많은 험로를 걸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 명칭도 시대의 변화와 힘께 다양하게 불러 왔다.

세종이 그 어려운 역경을 견디고 창제한 《훈민정음》의 창제정신을 후대 왕들은 이어가지 못했다. 계유정난과 사육신 사건을 거치면서 세조의 반대편에 섰던 집현전 학사들이 큰 화를 입었다.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즉위 초 훈민정음을 중시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세종의 최대 업적 《훈민정음》과 관련이 많은 부서 집현전과 정음청을 폐쇄하고 말았다. 《훈민정음》도 마찬가지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창제 이전의 한자 ‧ 한문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훈민정음》의 다양한 명칭을 살펴보면 그 험난했던 시련의 길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이란 말을 처음 사용산 것은 <조선왕조신록> <세종실록> 세종 25년(1443년12월 29일 조이다. 이 외에도 <해례본> 제목. <정인지 서문>. 신숙주의 <동국정운> 서문 등에 기록되어 있다.

癸亥洞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1443년 계해년 겨울 12월.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 이라 하셨다.>

《훈민정음》이란? 세종이 직접 계획하고 집현전 학사들의 도움으로 만든 우리 민족 최초로 만든 문자이다.
《훈민정음》의 뜻은 다음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둘째. 세종이 창제하고. 우리 민족이 사용할 문자 체계를 이르는 말이다. 셋째. 《훈민정음》이라는 책의 제목이다. 넷째. 《훈민정음》. 곧 해례본을 말하는 것으로 <정음편>과 <훈민정음해례편>에 기록된 이론적 해설 내용과 그 체계를 이르는 말이다.

둘째. 정음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판심의 판심제로 <정음과 정음해례>가 기록되어 있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뒤에 《훈민정음》을 줄여서 <정음>이라 불렀다. ‘정음’은 《훈민정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셋째. 언문이다.
《훈민정음》이 참되고 반포하는 과정에서 ‘언문’이라는 명칭은 널리 쓰였다. 요즈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낮추어 부르는 이름은 아니었다. 한문본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경우에 ‘언해’ 또는 ‘언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조선왕조신록> <세종신록> 세종25년(1443년) 12월 29일 조의 기록이다.

是月 相親制諺文二八字基字 倣古篆
<시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세종 26년 1444년) 1월 20일 최만리와 갑자상소 6인이 올린 상소문에도 ‘언문’ 이라는 말이 나온다.

神燈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天古
<신들이 엎디어 보옵건데 언문을 제작하실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넷째. 언서이다.
언문으로 기록된 책이나 글자를 말하며. 우리말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다.

다섯째. 한글이다.
오늘날 가장 널리 쓰이는 우리말 이름이다. ‘한글’이란 말은 ‘한[大]. 하나[一]와 ’글[文]‘이 만나 이뤄진 이름으로. ’오직 하나뿐인 크고 위대한 첫째가는 글‘ 이라는 뜻이다. 1910년 주시경 선생에 의해 널리 퍼졌다. 1913년 신문관에서 발행한 어린이 잡지 <아이들 보이>의 끝에 횡서로 ’한글‘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주시경은 1913년 조선어문회에서 ‘배달글 음’을 ‘한글모’ 로 바꾸었고 1914년에는 ‘조선어강습원’을 한글배곧’으로 고쳐 불렀다. 그리고 1927년 조선어학회에서 발간한 잡지의 제목이 <한글>이었다.

여섯째. 반절이다.
중국 한자어의 경우 발음을 적을 때 반절법을 사용하여 그 음을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동’ 자의 경우 덕홍절이라 쓰면. 덕 자에서는 초성 ‘ㄷ’을 취하고. 홍 자에서는 중성[모음]과 종성{받침} ‘ㅗ’ 와 ‘ㅎ’을 취하면 ㄷ + ㅎ = 동으로 읽고 쓰는 한자 표기법이다.

일곱째. 가갸글이다.
한글을 공부할 때 처음 따라하는 말이 ‘가갸’이기 때문에 한글을 ‘가갸글’이라고 불렀다.

여덟째. 암클
‘여자들만이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비하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그 당시 사회의 퇴폐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쓸쓸한 명칭이다.
아홉째. 아햇글이다.
‘아이들이 쓰는 글’이라는 뜻으로 한글을 낮추어 부르는 이름이다.
열째. 한국어이다.
‘나라의 말과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말 한글의 대외적으로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열한쩨. 국자이다.
‘국가에서 사용하는 문자’ 라는 뜻이다. 글보다 글자를 더 강조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열두째. 국문이다.
‘국가에서 사용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국자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며. 글자보다 글을 더 강조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열셋째. 국어이다.
한글의 다른 이름으로 ‘나라의 말’ 이라는 뜻이다. 대내적으로 부를 때 쓰이는 이름이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서 두루 쓰이는 한자말의 우리말 이름이다.
열넷째. 국서이다.
국가에서 사용하는 글씨 또는 글자를 말한다. 기록에 더 비중을 둔 명칭이다.
열다섯째. 조선어이다.
개화기 이후로 조선의 국호를 따서 널리 쓰였던 이름이다. <조선어학회>와 <조선어문회> 등이 그 예이다. 말과 글자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열여섯째. 조선글이다.
조선어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이름이다.
열일곱째. 우리글이다.
‘우리들이 쓰는 글’의 준말이다. 한글은 우리 모두의 글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이름이며. 글자에 더 비중을 둔 명칭이다.
열여덟째. 우리말이다.
‘ 우리들이 쓰는 글’의 준말이다. 우리글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이름이다.

나. 《훈민정음》에 대하여
1. 한글 서체 《훈민정음》의 변천 과정.
가) 《훈민정음》 서체의 시작
《훈민정음》. 곧 한글은 우리민족이 이룬 모든 문화 가운데 가장 으뜸이 됨은 물론 세계 최고의 기록 문화이다. 다시 말해 문자의 모든 면에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문자이다.
생성 과정에서의 사상적인 근거. 문자의 자모형태의 과학성. 모든 음성을 문자할 수 있는 자질. 문자의 가장 보편적 역할인 익히기 쉽고 쓰기 쉬운 점 등 문자로서의 최고의 가치가 있는 세계 최첨단의 문자 유산이다. 《훈민정음》이야말로 우리 겨레가 세계 모든 열방을 향해 자랑할 수 있고. 실제로도 최고의 가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문자 언어인 것이다.

《훈민정음》. 곧 한글은 비교적 짧은 역사 속에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왔다. 지금으로부터 574년 전에 있었던 《훈민정음》의 반포는 문자 예술인 서예. 곧 새로운 손 글씨의 시작을 알리는 경천동지할 핵폭탄 같은 예술 장르가 되었다. 오늘날의 그 어떤 정치적 사건보다 더 충격적인 언어와 문자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특별히 동양 서예술사의 신 지평을 연 새로운 서체의 경이적인 등장이며. 독창적인 형태미를 자랑하는 최고의 문자에 서예술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동양의 서예술은 오체 곧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로 이뤄져 있다. 중국 고대의 결승분자와 휘호문자로부터 문자의 형태를 갖춘 이후 은대의 갑골분자. 은 ‧ 주 대의 종성 금문 곧 .대전 .진대 소전. 한 대의 팔분 곧 예서와 복간과 장초. 위진남북조 시대의 북위 해서와 진국의 행서. 당대의 해서와 행초서의 형태로 왕조가 바뀌면서 서체도 함께 변화 발전하였다.

《훈민정음》의 <해례본>에 기록된 문자는 창제될 때부터 서예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서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예술이 서예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예의 필사의 방법이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 과정에서 쓰였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하겠다.
우리 문자 한글은 《훈민정음》을 만들려는 시작 단계부터. 만드는 중간 과정. 그리고 완전히 완성된 뒤에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반포 되었다. 당시는 한자 문자 시대여서 조선의 사대부 양반들은 하자의 사용이 오히려 편하고 좋았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지식층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불필요하고.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인 사회 문위기 속에서는 새로 만든 문자. 곧 《훈민정음》이 공식적인 문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일상에서의 원활한 사용은 전혀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식자층에서 《훈민정음》을 벽안시할 때에도 《훈민정음》은 고요히 물 흐르듯 조금씩 민중의 문자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철저하게 외면당하는 현실을 딛고. 한자와 대립하면서 우리말에 꼭 맞는 우리문자로. 일반 평민들의 인정을 받으며 발전해 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일부 의식 있는 문학가들. 곧 상강 정철. 교산 허균. 고산 윤선도. 서포 김만중. 노계 박이로 등의 학자들은 위대한 한글 문학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분들이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민족의 선각자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예상했듯이 거의 모든 양반들은 《훈민정음》에 대하여 무관심 일변도였다. 아니 한글을 천대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상에서 그 글씨를 사용하거나 써서 예술작품을 만드는 사람들까지도 천대하고 그 가치를 폄하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 말과 글이 맞지 않아서 오는 피해는 엄청나게 컸을 것이다. 그 손해는 차치하고라도 전달조차 못하는 데서 오는 민중들의 답답함과 심리적 갈등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언어와 문자의 불협화음은 문화의 계승과 발전을 막고. 사회적인 신분의 차이에 따른 갈등을 심화 시키고. 나아가 나라의 분열로 연결되어 국가의 몰락에까지 영항을 미칠 수가 있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조선의 네 번째 왕인 세종대왕은 한자의 음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던 임금이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의 운서 <홍무정운>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 이미 그 분야 연구에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던 진정한 현군이었다. 그 결과 음운학적으로. 음성학적으로. 사상적으로. 체계적으로 완벽한 산물인 《훈민정음》이 탄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큰 사건은 임금의 이름만을 빌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 곧 ‘한글’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모든 과정이 대왕의 철저한 계획 아래 이뤄졌던 것이다. 학문적 배경. 사상적 배경. 음성과 음운의 연구 과정. 원리의 적용 및 음운이 분석과정. 끝으로 완벽한 검토와 활용을 거쳐 완성되었다.
세종은 《훈민정음》이 모든 시험과정을 통하여 흠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국제 정체 곧 중국과의 관계까지도 합리적으로 판단한 뒤에 마침내 세종 28년(1446년) 음력 9월 상한에 반포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국경일로 지키는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하지만 <세종신록>에도. 그 어떤 자료에도 10월 9일 반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앞의 기록처럼 음력 9월 상한. 곧 음력 상순에 반포했다는 기록뿐이다. 정확한 반포 날짜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절대 군주의 왕정 시대에 그런 내용을 정확히 기록할 수 없는 상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방적으로 ‘너희는 알 필요 없어’ 라고 일축하면 끝나는 문제인가?

나) 한글 서체의 발전
《훈민정음》의 문자적인 발전과 한글 서예의 예술적인 발전은 서로 반비례하여 진행 되었다. 세종의 승하 후 문종도 병약하여 즉위 3년 만에 승하하고 말았다. 이어 12세 등극한 어린 단종은 2년 만에 수양대근의 쿠테타로 폐위되고. 어어 유배된 뒤 수양대군의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단종의 복원운동을 인해 사육신을 포함하여 수많은 관련자들이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세조는  자신의 반대세력이 《훈민정음》의 창제에 관여한 집현전 학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훈민정음》의 활용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기득권과 사대부들은 한자 ‧ 한문에 더욱 깊게 심취되어 한문학과 사상의 연구는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한편 세상 최고의 문자 《훈민정음》의 사용은 도외시되고. 한문학에 밀려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나 《훈민정음》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길로 방향을 선회하여 발전해 나갔다.
이때 섬광처럼 나타난 것이 한글 서예의 새로운 탄생이었다. 한글 서예는 궁중에서 소설과 문서와. 서간의 필사를 통하여 화려하게 비약적으로 발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글 서체의 변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규범과 예술적인 접근으로서 《훈민정음체》와 필사. 곧 기록을 묵적으로 하는 <한글필사체>로 나눌 수 있다.
《훈민정음》에 기록된 최초의 한글 자형은 반듯하고 원만하며. 올곧고 방정한 기하학적인 도형의 틀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분히 이론적으로 설명이 필요했었고. 서예가들이 한문서예에 기초하여 방정하게 썼기 때문이었다.

《훈민정음》의 정이지 서문에는 ‘상형이자방고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의미를 살펴보면 한문서예 전서체의 획과 결구를 원용하여 차형. 곧 글꼴을 완성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자모의 글꼴은 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결구는 좌우가 대칭이었고 선질은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글꼴이었다. 글자의 크기도 고르고. 변화가 거의 없는 통일된 자형을 취하고 있었다. 예술적으로도 한 점 모자람이 없는 자형. 변화와 멋이 넘쳐나는 글꼴. 균형이 잘 잡혀 얼른 모기에도 아름다움이 충만하고 다양한 어울림. 결체와 획과 자모의 조합이 완벽한 글씨의 형태를 갖추었던 것이다.

세상에 처음 탄생한. 새로 만득어진 문자가 이렇게 흠 없이 완전할 수 있을까?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한글을 쓰면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데. 하물며 한자만 쓰던 당시에 《훈민정음》의 창제와 그 반포는 놀라움을 뛰어넘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요. 기적 같은 감격적 쾌거였던 것이다.
《훈민정음체》. 곧 한글 서체는 풍만하고 인정된 자형과. 좌우로 균형이 잡혀 흐트러짐이 전혀 없는 글꼴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예술적으로 볼 때 《훈민정음》은 서예는 물론 문자 예술과 손 글씨(Calligraphy)를 자유자제로 할 수 있는 지상에서 가장 멋진 문자인 것이다. 이런 한글이 우리의 문자라는 것이 우리 모두는 자랑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없는 긍지를 느끼면 느낄수록. 세종대왕의 그 탁월하고 앞서가는 지혜로운 예지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지구상에서 문자 그 자체로써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문자는 겨우 몇 개에 불과하다. 서예를 통해 사상과 의미의 전달은 물론 예술로 완전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문자가 《훈민정음》. 곧 한글인 것이다.
《훈민정음》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안정된 글씨꼴을 가지고 있었다. 요즈음 널리 불러지고 있는 <판본체>. 곧 <훈민정음체>는 필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글꼴이었다. 예술적인 측면이 더 강하게 작용해서 멋은 있을지 모르지만 빨리 써야 하고. 쉽게 쓰기 위한 문자 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훈민정음》의 글씨꼴은 자연스럽게 필사하기 좋은 서체로 점점 변해 갔던 것이다.

2. 《훈민정음》반포 초기의 전적에 나타난 《훈민정음체》
가) 초기 전적
《훈민정음》 반포 초기에는 《훈민정음체》로 쓴. 내용이 적어 낱장으로 된 창작 발간물은 없었다. 《훈민정음체》 쓴 모든 글은 양적으로 많은 내용을 담아야 했기 때문에 서책으로 엮어서 간행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의 한글은 거의모두 방정하고. 무겁고, 서예에 비중을 많이 둔 자형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기록물은 매우 적다. 그렇지만 초판본을 비롯하여 중간본이 많아서 자형의 변천을 집작할 수 있다.

① 《훈민정음》 창제(필사본. 세종 25년.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
② <용비어천가> 편찬(세종 27년. 1445년 4월).
③ 《훈민정음》 반포(세종 28년. 1446년 음력 9월 상한 간행)
④ <용비어천가> 간행(세종 29년. 1447년 5월).
⑤ <동국정운> 편찬(세종29년 1447년).
⑥ <동국정운> 간행(세종 30년 1448년).
⑦ <석보상절> 간행 세종31년. 1449년).
⑧ <월인천강지곡> 간행(세종 31년. 1449년).
⑨ <홍무정운역훈> 간행(단종 3년. 1455년 음력 2월).
⑩ <월인석보> 간행(세조 5년 1459년).
⑪ <훈민정음 언해본> <월인석보본> 간행(세조 5년 1459년).
⑫ <능엄경언해> 간행(세조 7년. 1461년).
이상의 서책들은 이 시기에 간행되었던 대표적인 전적들이다.

나) 《훈민정음》 <언해본> 이후의 전적
《훈민정음》의 기록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필사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자형이 조금씩 우사형으로 변해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자의 해서체 글꼴로 변해 갔고. 필획의 성질이 방필로 변해갔다.
이 시기의 기록물은 그다지 많은 편이 아니다. 희귀하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이 시기는 계유정난( 1453년)을 비롯하여. 단종의 폐위(1455년). 집현전 학사를 중심으로 한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인한 병자사화(1456년). 단종의 노산군으로 강봉(1457년). 단종의 강원도 영월 청령포 자규루 유배 사건(1457년). 단종 서인으로 강봉(1457년). 그리고 단종의 의문사(1457년)등 우리나라 역사가 기록 된 이래 가장 참담하고 비인간적인 참극이 벌어졌다. 수양대군을 비롯한 한명회. 권람. 양정. 홍달손. 홍윤성 등은 수많은 인재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권력을 잡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간들이었다. 수양대군은 그렇게 스스로 천륜을 어기면서 왕위를 찬탈하였던 것이다.


이때의 문제는 한글을 창제 과정에 많이 관여 했던 집현전 학사들이 모반에 가담했다 하여 <언문청>을 폐쇄하고. <집현전>을 철폐하고. 《훈민정음》마저 천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결과 《훈민정음》은 비하되고. ‘언문’. 또는 ‘암글’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천민들과 규중에서나 배우고 익히는 문자로 전략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문화의 융성을 짓밟은 사악한 무리들이었다.

그 시기는 언문 곧 한글을 경시하던 시기에서 문자의 변형이나 새로운 자형의 발전은 거의 없었다. 그런 사회적 변동 속에서 <훈민정음 반포체>는 예술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완전히 사라져 가고 말았다. 다만 궁중에서 궁녀들을 중심으로 한글의 필사체인 궁체가 널리 퍼져 귀중한 서체의 발전과 함께 서예사적으로 빛나는 한글 서예문화가 창궐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전적으로는 <훈민정음 언해본> <세조 5년 1459년). <노걸대언해> (숙종 원년 1675년 간행). 박통사 언해를 들 수 있다.

3. 한글 서예 《훈민정음》의 명칭과 변천에 대하여
한글 서체의 명칭은 그 짧은 역사에 비하여 비교적 다양하다. <훈민정음체>. <정음체>. <판본체>. <반포체>. <고체>. <판각체>. <목판체>. <목판활자체> 등으로 부르고 있지만. 완전한 명칭의 통일을 이루지 뭇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판본체’ 라는 명칭이 오늘날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불러지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이론적인 근거가 없어서인지 그 명칭에 대한 논쟁과 이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언젠가는 가장 합리적이고 공감이 가는 명칭이 정해지리라 여겨진다.

그렇다하더라도 필자의 생각에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는 명칭은 《훈민정음체》이다. 조선조의 서책 인쇄 방식인 목판본과 목한인쇄에서 근거를 두고 있는 불분명한 <판본체> 보다는. 최초의 우리 한글 명칭인 《훈민정음》에 이론적 근거를 둔 《훈민정음체》를 그 명칭으로 사용한다면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고. 민족자존의 의미도 있고. 기억하기도 좋아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에 <훈민정음체>의 특징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 훈민정음이 실생활에서 전혀 쓰여 진 역사가 없는 최초로 창제된 문자였기 때문에 필사의 기법은 아직 몰랐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그 때까지 해왔던 한문 서예 기법으로 자형을 필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시대의 필사도구가 연호의 붓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한문서예에 기초를  둔 필사법을 사용하였다.

둘째. 훈민정음 해례본에 수록된 한글의 자모와 자형은 목판 활자본이기 때문에 목판에 묵사로  먼저 쓰고 그 자형을 칼로 각 지게 새겼다. 따라서 붓으로 쓴 글씨가 아니고 각서인 것이다.

셋째. 《훈민정음》 제정 당시의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글자의 형태에 다하여 규정하는 말이 있다. 그 말은 곧 ‘상형이자방고전’인데 《훈민정음》의 글자형태가 전서자형을 본떴다는 기록이다.

넷째. 글자의 필획이 진대의 소전형식인 태산각석. 역산각석. 회계 각석. 등의 원필 서법을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보이게 함은 물론 단정하고 우아하게 보이기 위해 좌우로 대칭된 전서의 결구법을 본떠서 자형을 결정하였다.

여섯째. 이 시기에 간행된 서책에 쓰인 자형은 거의 모두 방정하고. 무겁고. 서예에 비중을 많이 둔 자형이었다.

일곱째.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의 기록물은 매우 적다. 그렇지만 오늘날 까지 전해오고 있는 귀중한 초기 전거들을 통해 한글 서예 자형의 변천을 짐직해 볼 수 있다.

여덟째. <훈민정음체> 의 기필부와 운필부. 그리고 수필부의 필획은 원필의 획이 기본이었다. 그렇지만 실생활에서의 훈민정음. 곧 한글의 필사는 원필이어서 속도를 요구하는 필사체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편리성의 원칙에 따라 곧 빨리 쓸 수 있는 자형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아홉째. 성종 12년(1481년)에 간행된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에서의 한글 서체는 필사의 편리함을 따른. 오늘날의 활자체와 매우 흡사한 자형으로 변모하였다.

열째. <훈민정음체>는 필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기필부분이 모난 방필형이 원칙이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로 <용비어천가>. <동국정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은 필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기필부와 수필부가 모난 전서 획과 흡사한 필획으로 되어 있다 거의 모두 방필의 균일한 필획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훈민정음》 자형이 변하지 않고 그 때까지 일정한 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열한째. 단종 3년 (1455년) 간행된 <홍무정운역훈>과 세조 5년(1459년)에 간행된 <월인석보>. 그리고 언해본 《훈민정음》을 보면 이미 자형이 오늘날 인쇄체와 비슷한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ㄱ’의 모서리 부분이 방필로 변모하고 있었다고 국어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성종 이후로는 그 흐름이 더욱 두드러져 점점 필사의 편리함 쪽으로 변모해 갔다. 다시 말해 속도감 있는 글씨꼴로 변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열두째. 성종과 중종 이후로 한글의 자형은 현대의 판각체로 완전히 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열셋째. 성종. 중종 선조 이후로 한글 서체의 발전은 미미하였다. 이런 현상은 한글에 대한 천대와 펌하가 심해졌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이시기 이후로 한글 서체를 대표할 수 있는 궁서체(궁체)가 발현하여 우리 한글의 우수성은 물론 문자와 서체가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4. 《훈민정음체》의 서예사적 의미와 서체적 가치
문자를 필사 예술로 승하시킨 문자 언어의 대표는 대한민국의 한글 서예와 중국의 한자 서예. 그리고 일본의 가나 서예이다. 공교롭게도 동양의 세 나라가 자기 나라의 문자를 독립된 하나의 예슬 장르로 삼고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가나 서예는 독립된 서예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가나가다>는 한자의 변방을 차용하여 문자로 한 것이고 <히라가나>는 한문 서예의 초서 자형을 빌려서 문자로 쓰고 있기 때문에 한문 서예의 일부로 봐야지. 완전한 독립 서예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글자 《훈민정음》. 곧 한글은 그 문자의 역사가 574년 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의 다른 문자에 비해 그 역사가 매우 짧은 것이 사실이다. 한글 서예 또한 그 역사가 짧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사소한 글자 형식의 변화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토록 어렵고 힘든 여건과 부정적인 사회적인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도 한글 서예를 이만큼 이나마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도 우리 겨레만이 지닌 저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한글 서예 《훈민정음체》는 반포될 당시. 처음부터 필사 목적이 아니었다. 당시의 필사는 한문 서예가 기본이어서 《훈민정음》에 쓰인 서체는 단연히 한문 서체에 기본을 둔 것이었다. 따라서 전서의 획선처럼 반듯하고. 전서의 결구처럼 좌우대칭을 이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양하게 그 형태를 변화시켜 표현할 수 없고. 글자의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없어 작게 쓸 수 없고. 크게 써야만 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글자의 제한적인 서사법은  《훈민정음》이 반포될 당시의 자형이 서사목적의 글씨가 아니고. 제자원리의 철학적 규명과. 음운학적‧ 음성학적인 상세한 설명과. 사상적 배경의 합리적인 성격을 풀이하기 위한 글자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훈민정음체》는 서예의 예술적인 측면으로는 손색이 없는 훌륭한 한글 서예의 한 서체가 된 것이다. 서예사적으로 볼 때 참으로 다행한 일이 나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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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돈. 언문지주해. 신구문화사. 1948.
이숭녕. 세종대왕의 학문과 사상. 아세아문화사. 1981.
최현배. 한글갈. 정음사. 1961.
허경무. 조선시대 한글 서체의 연구. 부산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06.



< 참고 내용>
* 책자 자료 발췌 출처 : 사단법인 한국서예협회(2021 제 32호)에 발간. 저서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체’ 농인 김기동. 참고로 지은 글(원작).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체’는 저의 홈피 문서 작성과정에서 탈자 및 문서의 변경으로 인해 그 내용이 조금 상이할 수도 있습니다.
* 작가가 지은 작품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 집필에 도움주신 분 : 대천 최병섭
* 작품의 동기 : 이미 지구촌에 많은 학자 ‧ 지식인들에 의하여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가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작자의 소신은 작품 제목 ‘세계의 공통어 – 한국어’에 그 필요성 유발과 예상 진행과정 등을 사실적으로, 구체화한 예언서술 작품입니다.
* 우리는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다”라는 긍지로                 성군(세종대왕)의 어렵고 힘든 보살핌을 기억할 것입니다.
 
                                            2021년 5월 10일 동계 박 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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